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하 Apr 21. 2020

잠복기 (1)

Day2


친구들과 술을 퍼마셨다. 나머지를 뺀 모두가 모였다. 한 놈이 두부를 사 와서 내 얼굴에 문질렀다. 나는 출소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것을 사 왔냐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자유의 몸은 됐는데, 빈털터리가 된 새끼 같은 표정'이라면서 이거나 처먹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미친 듯이 마시고 깔깔거렸다. 행복하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Day3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다들 어제의 이야기들로 핸드폰 안에서 활발하게 떠들고 있었다. 어제의 사진을 보내줬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으나, 숙취 조금.


Day4


무얼 먹고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영어 학원을 등록했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으나, 고민 조금.


Day5


친구가 소개팅을 제안했다. 나는 거절했다. 지금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낮에 작업을 조금 하다가 저녁때에는 다시 또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여전히 재미있었다. 해가 뜰 때까지 마셨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으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Day6


거울을 봤다. 내가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미친 듯이 달리던 날들의 기록보다 5분 정도나 뒤처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5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감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우선 3킬로 정도부터 시작했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으나, 미약한 불안 조금.


Day7


운동, 공부, 작업 조금. 친구들을 낮에 만났다. 과거를 팔아먹으며 농담을 조금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으나 미약한 죄책감.


Day8


악몽을 꾸었다. 가장 보고 싶은 것이 꿈에 나왔고,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눈을 뜨니 비참함과 애처로움이 몰려왔으나, 오후 즈음 되니 정확히 어떤 꿈이었는지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공부 조금. 운동은 많이. 뚜렷한 증상은 없는 것... 같았다.


Day9


시내로 나가서 방황 조금. 며칠 쉬고 술을 마셨다. 저녁에 잡힌 약속이라 하루 종일 굶는 쪽을 선택했다. 친구들은 위장이 걱정된다고 말했으나, 그냥 마셨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Day10- Day59


나는 괜찮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나는 정말 괜찮다. 외로울 때에는 친구들을 만나고, 식단을 조절하며, 원래 달리던 그 기록들로 서서히 돌아간다. 나는 나를 통제하는 방법을 정말로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다. 나는 괜찮다.


Day60


그새 살이 많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치팅을 하기로 했고, 우리들은 다시 또 한 데 모여서 즐겁게 놀았다. 부족한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구질구질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나아가고 있었고, 발전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모두 건강했다. 서로 아프지 말고 잘 살아가자. 그렇게 말하며 축배를 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무리 안에서 가장 아픈 사람은 아니었고, 오히려 가장 아파보이는 친구에게 두부를 사 던져 버렸다. 전적이 있었던 그는 내게 뭐라고 하지 못했고, 우리는 그냥 웃어 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오란 가로등 아래서 담배를 피웠다. 취기 어린 날에 누구라도 좋으니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 호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는 것을 안다. 호소하기에 늦지 않았을지라도 내가 가장 원하던 것은 내가 울며불며 매달릴지라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숨 가쁘게 살아야만 했고, 나는 그 일을 정말로 잘, 그리고 성공적으로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가장 반듯하게 펴놓은 뒤에도, 그러나, 이 노오란 가로등 아래서, 취기 어린 입술의 느낌을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은 모든 것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그런 날이었고, 그러나 그 입술이 너무나 갑작스럽다 하기에는 이미 내 안에 마음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던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날로부터 모든 세계가 한 번에 펼쳐지는 것 같았고, 우리는 천천히 서로의 역사를 써나갔던 것이다. 그때 나는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쉽게 배웠고 그것을 너무나 쉽게 가졌다. 그 모든 순간들을 나는 알고 있었고, 그 순간들은 더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나 분명해서, 나는 그저 살아가기로 했다.


그때 눈물이 아주 작은 소리로 터졌고, 멋있지도 그럴듯하지도 않은 그런 눈물은 내가 삼켜낼 수 있을 정도로만 아주 미약하게 터졌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슬픔. 그러나 나는 그게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잔인하게 아픈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미약한 흉통. 발열. 눈물 조금.











Day1


헤어졌다. 아직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이전 08화 무너지는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