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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Dec 29. 2020

각자의 방식으로 위하며 살고 있어

타인의 편지 (3)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지금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가고 있어. 아빠가 가족끼리 식사하자고 불렀거든. 동생도 아마 오늘 중으로 내려올 거 같아.


고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고향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야. 아빠는 늘 말했지. 지방에서 태어나서 올라가 사는 것에 대해서 자부해야 한다고 말야. 아래에서도 살 수 있고 위에서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지. 그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내 식으로 그 말에 동의하곤 했어. 바삐 살다가 다시 돌아가 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가 두고 왔던 기억들을 다시 만나게 되거든. 그렇게 아주 어린 날에서부터 내가 걷던 길을 되걸으면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또 어떻게 여전히 지긋지긋하게 남아있는지를 자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야.


내 유년기의 지긋지긋함. 그것은 낯부끄러움, 그리고 수줍음, 정글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던 순간들로 범벅 져 있지. 나는 말야, 소설이나 영화에 나온 사람을 나와 동일시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인간 실격’에서 요조가 했던 말들에 대해서는 사실 가슴 깊이 공감했어. 내 안의 그런 겁들을 없애기 위해서 ‘익살’이라는 것을 고안해냈다던 그런 부분 말이야. 나는 부끄러워서 익살을 배웠어야 했어. 이겨내기 위해서, 어쩌면 더 멋지고 잘생기고 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혹은 그들을 나의 편으로 회유하기 위해서 웃기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지. 정글 같은 사춘기 시절 내내 그래서 나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되어 있었고, 나는 그런 나를 싫어하지 않았어.


물론, 이러한 것들이 꼭 ‘고안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지나친 과대 해석인지도 몰라. 사실은 늘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으니까. 그조차도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리지 않은지도. 다만, 그 안에서 일렁이던 나의 겁과 수줍음 같은 것들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눈도 쉽게 마주치지 못하던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그러한 것들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거든. 세상을 돌고 돌아 다시 나 살던 내 고향으로 돌아오면, 그에 대해서 문득 솔직해지고 싶은 거야.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두고 보면서, 그것을 진정시키면서 나를 다잡고 다시 또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거야.


어제는 후배들과 술을 한잔했어. 오랜만에 만나는 후배들은 이제 번듯한 직장도 있고, 제 할 일을 다 하며 살아내고 있었어. 나랑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아이들이지. 그러고 보면 관계라는 건 참 이상해. 전혀 접점이 있을 수 없었던, 어떠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반대 성향의 사람들이, 우연한 계기로 한 데 모여서 친해질 수 있었거든. 우리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여행 프로그램에서 한데 묶였고, 그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동고동락하게 되었던 거야. 그리고, 그렇게 그 만남이 여기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거지.


나는 성향에 대해서 상담하고, 그 성향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하지만, 결국 ‘관계’라는 것은 종종 ‘계기’이기도 한 거야.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과 사랑하게 되는 것도, 우발적인 만남에 의해서 시작되듯이 말야.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의 성향과 모습들을 통해서 관계를 점치려고 노력하지만, 그보다도 우선 관계의 시작이 그저 사소한 계기로부터 가능했다는 거지. 그게 우리들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만들어주는 걸 거야.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위해주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너무나 잔인하기도 하고, 또 너무나 감동적이기도 한 그런 사실일 거야. 한 친구는 강한 애착을 원해.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지. 그래서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는 것에 종종 서운함을 느낀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어. 그만큼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충실한 사람이기도 한 거야. 나는 종종 그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내가 누군가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줄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내 지긋지긋함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함부로 진심을 다하는 것에 대한 겁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 말야.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이미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천천히 들어주고, 또 나를 설명하는 방법을 선택해 보는 거야.


내게는 거리가 필요해. 모든 뜨거운 마음들은 지나치게 정답고 친절해서, 기대하게 되고 또 상처받게 만드니까. 타인의 일을 내 일처럼,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생각하게 되니까. 그것은 정말로 고맙고 아름다운 마음일 거야. 다만,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흔들리지 않는 관계를 주고 싶어. 늘 만나지는 않아도, 종종 만나서 언제나 정다운, 언제나 한결같은, 가장 뜨거운 것은 줄 수 없지만, 언제나 따뜻한 그런 관계를 주고 싶어.


내 앞에서 한 사람이 울어 버릴 때에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또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싶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에는, 그가 그것을 스스로 극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 그러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 들어보는 거야. 천천히 바라보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그것들에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


모든 사람은 의미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있어. 그런데 종종 그것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일이야. 왜냐하면 우리에게 더 시급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겠지. 돈을 벌어야 하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이 없어도, 이미 의미를 만들어내고 또 하루를 버텼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성취라는 것을, 나는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내가 그 모습들에 고무되어 살아갈 희망을 얻고 있다고 증명하고 싶은거야.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즐거운 일이야. 내가 억누르며 살아온 내 안의 겁을 진정시켜 주거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또 의미를 만들어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하도록 해주거든.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위해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사람은 또한 스스로를 위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 그러나 그래서 상처를 주고받고, 오해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던 거지. 그 안에서도 여전히 좋은 면을 살리고 또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은, 내 작은 욕심인지도 몰라. 사람들의 선의를 믿는 것, 열흘 중에 하루 오해를 낳고 싸운다 하더라도, 나머지 9일은 무언가를 망치도록 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이뤄내고 돕기 위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고군분투의 다양한 발현이 우리가 사는 세계일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 세계는 아직 괜찮다고 말야.


누군가의 삶이 두렵고 불안하게 떨려 올 때, 그리고 나도 이미 그것이 무엇인 줄 알 것 같은 날에, 나는 내가 고안해 낸 나의 지긋지긋하고 고루한 메시지들을 전해보는 거야. 내 안의 겁을 달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익살과, 기지와, 아름답게 포장해낸 그런 모든 것들을 총동원해서. 괜찮다, 괜찮다, 그리 말하면서. 그리고 또 그리 말하는 나야말로 타인을 통해서 위로받고 있다는 것을 실토하면서.


다들 잘 지내고 있니?


나도 내 안의 겁과 함께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어. 버스를 타고 고향에 돌아가는 날에. 내 유년기의 불안과 포근함을 모두 간직한 곳으로 가는 날에. 문득 오늘도 모두의 안부를 묻고 싶어. 가장 힘든 날에도, 여전히 살아내기 위한 내 안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해 내기를 바라. 나는 대부분의 모든 날에는, 나를 부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사실일 테니까. 그것을 인정할 때에야 종종 밥을 먹다 제 혀를 스스로 씹어버린 것처럼 발생하는 우리 생에 작은 실수도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거겠지.


사람은 왜 스스로 무너지는 걸까.


그건 우리가 굵고 또 커져가니까. 그래서 나무도 종종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쓰러지곤 하니까.


그렇지 않니?


2020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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