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하 Jan 19. 2021

영화 <파힘> : 난민 문제에 관한 어떤 상상력


1월 18일 용산 CGV에서 영화 <파힘>을 시사회 초청으로 관람하였다. 함께 한 지인과 나 모두 즐겁게 보았다. 이 영화는 방글라데시의 10대 소년인 파힘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사정에 의해서[그것은 이하에서 더 자세히 다뤄질 것이다], 프랑스로 그의 아버지 누라와 망명을 오게 된다. 그곳에서 파힘은 이른바, '난민'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파힘이라는 소년은 특별한 재능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체스를 아주 잘 둔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난민이자 이방인인 체스 신동의 프랑스 챔피언 도전기를 그리고 있다.


실화에 기반한 이 영화의 메인 테마는, 그 파힘이라는 소년의 '드라마'를 그리는 것을 중점으로 둔다. 그 안에서도 특별한 점은 '난민 문제'역시도 직간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영화는 지나치게 힘을 주고 이야기하지 않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단지 그 소년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있어 난민 문제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매력이라는 것은, 난민 수용의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를 그저 정치적 합의, 즉 찬반의 문제로 놓고 한 쪽의 일방적인 선택을 촉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저러한 사회문제와 관련한 난민 전체의 선입관에 대하여 다른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파힘이라는 소년의 가능성을 통해서 반드시 난민 수용의 문제에 하나의 입장을 선택을 강요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난민이라는 추상화된 집단 안에서도, 어떠한 보석들이 숨어 있는지에 관한 하나의 사례를 통한 상상력을 제공받는다. 즉,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난민의 표상 안에서도, 여전히 자라야 할 아이들의 모습과, 그 안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던 보석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선 그것을 현실에 기반한 드라마를 통해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가 가지는 강력한 힘일 것이다.


그 과정은 따뜻하고, 처절하며, 즐겁고도 뭉클하다. 난민 수용의 문제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조금 더 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관람을 권한다. 1월 21일 개봉 예정이다. 이하에는 스포일러가 있다. 주의를 요한다.




난민의 유입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

이 영화는 난민의 유입을 통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열악한 국가에서 잔존하는 여성차별의 문제라든지, 그들이 유럽권으로 넘어와 저지르는 성범죄의 문제 같은 것들을 주요한 이슈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파힘이라는 소년에게 주목하는 드라마가 중심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가족을 방글라데시에 두고 망명해야 했던 파힘의 아버지 역시도 편견의 온상으로서의 이슬람 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스로 건너온 방글라데시 인으로서 드러나는 갈등은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그러한 마찰, 문화의 차이를 통해 느껴지는 이질감을 완전히 감추며 파힘의 이야기를 미화하려 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예시로, 누라는 자신의 아들인 파힘이 버릇없이 굴 때마다, 자신의 손바닥으로 제 아이를 툭툭 때린다. 그 모습은 프랑스 현지 인들에게는 경악할만한 아동 학대의 일종으로 보일 것이다. 더불어 길 한가운 데에 웅크리고 있는 파힘 부자에게 동전을 적선하고 가는 모습들 역시도 간접적으로 그들 모습이 부랑자로 느껴진다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현지인과는 다른 이질적인 냄새가 나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무턱대고 살기 위해 넘어와서는 마땅한 언어 하나 통하지 않는 모습 또한 현지인들에게는 불통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예시는, 방글라데시인들이 '시간을 안 지키는 태도'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아버지 누라는 파힘이 체스에 더욱 정진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난민 보호소 근처에 있는 체스 클럽에 데려간다. 무뚝뚝하고 완고한 체스 감독인 실뱅은, 파힘의 실력을 보고 곧 그를 거두어들이지만, 누라는 그 수업에 자신의 아이를 늦게 데려간다. 그것도 무려 한 시간이나 넘는 시간 차이를 두고 말이다. 그에 대해서 누라는 자신이 제 아이를 늦게 데려다주었다는 개념조차 없다. 이에 파힘은 아버지의 말을 옮기며 이렇게 말한다 '방글라데시인들은 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행복해요.' 시간 개념이 전혀 다른 것이다.


난민 유입의 불가피한 이유와 그들의 삶

한편, 영화는 우선 그러한 차이의 문제를 어느 한편에서 처단하거나 종용하려 하기보다도, 다른 전략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중 하나는 그 차이가 발생하기 이전에, 그들이 우선 누리고 있던 그 삶에 대한 모습들이다. 방글라데시는 내전 중인 국가는 아니지만, 그보다도 더 질이 떨어진 경제 사회 문제에 처해 있다. 그 안에서 파힘의 아버지는 반정부 시위를 벌이다가, 정부에 밉보여 망명을 시도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반정부시위라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 처우 개선에 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안에서 정말로 누라가 아들 파힘을 데리고 떠나려 위험을 감행한 이유는, 정부에서 자신의 아이를 납치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파힘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하지만, 사실 파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불가피한 망명의 시도로부터 그들이 떠나온 바로 그곳을 단순히 끔찍한 곳으로 묘사될 수도 없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불통에, 시간 약속도 지키지 않는 무력한 인간으로 이해되는 누라는, 사실 방글라데시에서는 평범한 소방관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한 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열악한 대우에 반발하여 그는 시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파힘에게는 누이와 이제 갓 태어난 동생, 그리고 사랑하는 자신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 안에서 누라와 파힘 모두 가족이 존재하는 그 터전을 두고서 망명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 문화의 차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상호 간의 대비나 이해 없이 유입되게 되면, 반드시 갈등은 발생한다. 더불어 소수 세력의 유입을 통한 갈등의 발생은 반드시 차별로 이어진다. 그러한 차별을 견디기 어렵다면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도 하나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난민의 유입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범죄는 본토의 사람들의 반발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 안에서 상생을 생각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발적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그 망명의 이유와, 그들이 전혀 다른 문화권 안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피폐하고 동시에 익숙한 그곳으로부터 떠나온 그들이 무엇을 상실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영화는 가족에 대한 파힘의 그리움과, 그들의 삶에 관한 회고적 묘사를 통해 그를 그려내고 있다. 설령 그들의 삶이 방글라데시인들, 더불어 내전으로부터 탈출한 모든 난민들의 삶을 전적으로 대표하는 것일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사라질 수 있었던 것들

그런 뒤, 망명 이전 그들의 삶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 더욱 대담한 한 걸음이 필요하다. 영화는 그것을 그려내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고,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그것은 실제로 망명하지 않았더라면 사라질 수 있었던 사람들의 현재와 또 미래이다. 소년 파힘은 이미 방글라데시에서부터 뛰어난 체스 실력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납치할 대상으로서 쉬운 타겟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망명의 하나의 이유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다른 하나의 이유는 조금 더 적극적인 이유이다. 그것은 더 나은 곳에서 한 명의 소년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체스를 더욱 매진하여 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모습들이 드러날 때, 우리가 위에서 이야기한 역설들도 점점 영화의 서사 내에서 완화되기 시작한다. 파힘이 만난 프랑스 현지에서의 스승은 실뱅이라는 늙은 아저씨였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가졌고, 또한 체스에 대해서 대단한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에 의해 완고하고 강압적이기도 하였다. 그 사실은 그가 젊은 날에 챔피언의 자리를 앞두고 결승에서 패배하였다는 열등감도 한몫하였을 것이다. 영화는 실뱅과 파힘의 관계가 점차 라포를 형성하며 무르익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파힘이 적응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과정도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그려낸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역시 아이의 성장이다. 파힘은 뛰어난 체스 감각을 가진 소년이었지만, 그래봤자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시선에 대한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였을 때,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기도 했고 무승부를 선택하느니 차라리 패배하는 것이 낫다고 객기를 부리기도 한다. 그 안에서도 실뱅은 파힘의 가능성을 보고서 마음을 열고 마음을 통제하고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치도록 한다.


그 안에서 다만 체스 실력이 성장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파힘은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들 사이에서 불어를 익혀 나간다. 확실히 파힘이 특출난 소년으로 보였던 이유는, 그가 체스에서뿐만 아니라 언어적 재능과 수학적 재능에 대해서도 뛰어났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그는 빠르게 언어를 익히고, 문화를 익힌다. 이러한 사실이 나타내는 것은, 아이의 가능성이다. 즉, 아버지 세대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터잡고 자라난 아이들은 그 사회에 적응하고 배워나가며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 사실이 단순히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지점은 파힘이 불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버지더러 '제 말을 알아듣고 싶으면 불어를 배우세요'라고 소리 지른다거나, 파힘이 어느새 음식을 포크와 나이프로 먹기 시작할 때에, 아버지는 여전히 손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질 때 분명해진다. 그 안에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망명하였음에도 그곳에서 더욱 무력해지는 아버지 세대의 어려움과, 빠르게 적응하고 과거를 잊어가는 아들 세대의 괴리감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난민의 부분과 전체,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

방글라데시에서 있었더라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한 소년의 모습과, 그 소년의 변화 과정들이 우리 앞에서 그려진다. 그 과정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고, 구슬프고 아프게 나타나기도 한다. 어린 파힘은 망명 심사국에 부적격 판정이 나도 남을 수 있지만, 아버지 누라는 강제 송환을 당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그 안에서 누라는 도망쳐 난민촌에서 터를 잡고,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버틴다. 파힘은 그 안에서도 굴하지 않고 체스를 익히고 훈련하며 결국 프랑스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아버지의 강제 송환은, 챔피언이 된 파힘의 유명세와 함께 반려된다. 그리고 파힘은 그토록 그리던 자신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이 결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세심하게 살펴봐야 할 곳이다.


체스 클럽 원장은 프랑스 총리에게 공개 문의를 하게 된다. 그때 프랑스 챔피언이 된 파힘의 이야기는 총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고, 그의 재능을 통해서 파힘의 아버지는 구제된다. 그러나 그만큼 파힘과 그의 가족이 구제되고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모든 난민들의 수용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확정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특출난 재능을 가진 소년이 이제는 프랑스라는 테두리에서 챔피언이 되었다는 공로로 인해 그저 특혜를 받은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우선 이해해야 하는 것은 전체와 부분 사이의 관계일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파힘과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평범하게 불운한" 난민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몇몇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만이 새로운 땅에서 받아들여질 뿐인 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국가에서 전체로서 이루어지는 열악한 온상이고,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그런 터전이 사라질 때 어디 있는지도 모를 보석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어떻게 자랄 수 있을지를 비로소 꽃피워보기도 전에 사라진다. 파힘 역시도 망명에 실패했다거나, 새로운 땅에서 그를 알아본 실뱅과 같은 스승이 없었다면 챔피언으로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즉, 특별한 이들은 평범한 것들보다 더 쉽게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르나, 특별한 개인들도 결국 보편적인 터전 위에서 살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세상은 복잡하기에, 때로는 아름다운 것으로, 때로는 추악하고 끔찍한 것으로 드러난다. 특출나거나 위대한 이들도 바로 그러한 아름답고도 추악한 공동체 안에서 자라난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파힘 역시도 평범한 방글라데시 가정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간과 평범한 인간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밀접하다. 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가능해야만 하나의 개인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안에서 난민 문제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은, 하나의 공동체의 붕괴 안에서 도대체 어떠한 얼굴과 모습들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특별한 개인들만을 선별하여 그들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충실한 중등, 고등교육과정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교육받고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가족과 스승과 곁에 있는 친구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난민이라는 추상적인 하나의 집단은 그 근본적인 토대가 사라진 모든 이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는 중요한 씨앗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하며, 어떻게든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 파힘의 사례는 바로 그 반짝반짝 빛나는 가능성의 씨앗이 어떻게 사라질 수도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살아난 하나의 가능성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었는지를 상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전히 난민 수용의 문제는 뜨거운 이슈이다. 그 안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는 방법은, 한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일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어떠한 반례와, 어떠한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을지를, 잊지 않고 상상해내는 일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가각하며 영위하는 이 공동체가 없는 이들에게서 도대체 어떠한 등불이 소리 소문 없이 꺼져버렸는지를 떠올리는 일이다. 그럴 수 있을 때에야 우리가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입장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괴물이 되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큐 <증발> : 실종아동과 가정의 삶, 우리의 역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