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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21. 2021

빛이 머무는 동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을 읽고

 하얗게 얼어붙은 강을 들여다본다. 두꺼운 얼음 아래로 한때 내게 속했던 시간과 기억들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나는 그것들이 변함없이 내게 머무를 것이라 믿고 있었다.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면 지난 시간이 빛바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삶에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세월의 더께가 쌓여갈수록 삶은 무거워지고 낡아져서 언젠가부터 나는 웃음으로 가득했던 세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균열이 시작된 시간은 서서히 부스러졌고 기억은 아득한 꿈처럼 멀리 사라졌다. 


 빛을 마시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빛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상 퇴색된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시간을 돌아보는 존재만이 빛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잃어버린 시간 속에 갇힌 존재들을 떠올렸다. 부서지고 빈약한 기억들을 끌어 모았다. 복기를 통해 복원에 이르고자 했다. 시간의 부스러기가 쌓여가는 아득한 시공간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까닭으로 나는 그것이 내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그동안 나는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시간을 잃어버렸다. 시간과 맞닿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앞으로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시간은 망각의 강을 따라 흐른다. 재깍재깍. 짧은 순간이라도 붙잡아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빛을 붙잡아 꿀꺽 삼킨다. 그리웠던 시절의 장면들이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따뜻하고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 눈물이 흐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순환하고 돌아온 빛이 눈을 뜬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가 사라진다. 다시 어둠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작품들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복기와 상실 이전의 세계에 대한 복원을 그리고 있다.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돌이키기 위해 덧없는 행위를 반복하며 슬픔의 숙명을 변주하는 작품들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놓여있다. 


 혁명과도 같은 기술로 새로운 문명을 연 셈이니 ‘펼쳐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세계가 ‘놓여졌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진일보한 인류는 그에 걸맞은 과학기술을 탄생시킨다. 유전자 조작으로 신인류를 만들어내고 감각만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물질을 빚어내고 빛의 속도로는 인간의 생이 마칠 때까지 닿지도 못할 행성에 며칠 만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도 찾아낸다. 불가능이 없는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완벽한 유전자로 구성된 인간이 태어나고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없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완벽한 세계. 


 완벽한 세계에 도착해버린 인간은 이전까지 완벽하지 못한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많은 것들을 두고 왔다. 그것으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과학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인간 본연의 마음은 완벽한 세계로의 진입을 거부한다. 좀 더 진실에 가깝게 말하자면 진입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문명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머나먼 곳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데, 인간의 마음에는 그 손짓이 보이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면서도 인간은 남겨진 것들을 뒤돌아본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소중한 존재들을 잊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간직한다. 바쁘게 살아가다가 문득 어딘지 모를 곳에 두고 온 듯한 아득한 그리움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짓는 이유는 과학기술의 속도와 마음의 불균형을 거쳤던 기억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공생 가설>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인간이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복기와 복구의 염원이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난 소설이다. 보육원에서 자란 류드밀라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탁월하게 재현하여 그려내는 것.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류드밀라는 자신이 살았던 곳이라고 말하며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그린다. 류드밀라가 그린, 이름 없는 행성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향수를 느낀다. 그리워하는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리움의 감정에 휩싸인다. 사람들은 그 세계를 류드밀라의 행성이라고 부른다. 모두 그곳에 닿고 싶어하지만 방법이 없다. 사실 류드밀라의 행성은 실제로 존재했으며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졌던 세계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서 사라진 세계가 되었다. 


 인간에게 공생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이 사라진 세계의 주인들이다. 소멸된 행성에서 탈출한 그들은 정신을 담을 몸이 없는 것인지 인간의 몸에 기생하며 인간의 내면에 인간성을 불어넣는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인간의 자아가 강력해지기 전까지만 공생할 수 있는 운명으로 일곱 살 이후로는 인간에게서 떠나게 된다. 그들은 떠나지만 흔적이 남기 때문에 인간은 한때 자신들에게 속해있었던 그들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작가는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여 인간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담담하게 적어갔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찾고 싶은 것들에 대한 답을 찾아갔다. 나는 유독 오래된 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애쓸 때가 많다. 내게 있어서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마음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공생 가설>을 읽기 전까지 나는 시간과 비례해서 빨라지는 망각의 속도를 두고 흐릿한 기억력을 탓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망각이 아닌 상실이라는 단어를 중심에 세우고 다른 시각에서 기억의 부재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떠난 뒤부터 더 이상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내게 ‘그들’은 소설 속에서처럼 인간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상실해버린 유년시절의 순수와 훼손되기 이전의 마음을 뜻한다.

 모든 것이 내게 있을 때 나는 그것들을 찾지 않았다. 잃어버리고 난 뒤에 찾았다.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회라는 단어 자체에 뒤늦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뒤늦은 후회’라고 발음하자, 얇은 과자의 테두리처럼 기억이 부서진다. 상실해버렸다는 뒤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슬픔에 젖은 발걸음을 떼어낸다. 


 류드밀라는 그들의 존재를 일찌감치 자각했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가족 없이 외로웠던 류드밀라의 간절한 염원이 그들을 붙잡았다.      


 어둠 속에서 달이 떠오른다. 이지러진 달이 빛으로 채워진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도 차곡차곡 빛을 채우는 달을 올려다보며 나는 얼어붙은 강에 발을 내딛는다. 소중한 존재들을 떠나보내고서 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빛을 채워나간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나로서는 두꺼운 얼음 아래로 흘러가는 기억이 더 멀어지기 전에 마음에 새기고 빛을 채우는 것 밖에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복기와 복원에 대한 염원이 망각을 더디게 할 것이라 믿는다. 삶에 천진한 웃음을 짓고 큰소리로 웃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최소한 빛을 따라가지 못해 실패했다고 울지는 않을 수 있으니. 


 나는 늘 빛보다 느렸고 빛보다 먼저 차가워졌다. 이제 빛이 머무는 동안이라도 온기를 한껏 받아들이고 싶다. 내게서 나오는 빛이 얼어붙은 강을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다면. 두껍게 얼어가는 강 아래와 맞닿아갈 수 있다면. 그런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을 꿈꾸며 차가운 겨울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을 마신다.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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