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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Aug 24. 2022

여름에는 이름을 줍고

여름 상설 공연/ 박은지


낭떠러지의 꿈은 이어지고

짝꿍은 종일 낭떠러지 아래서 이름을 주웠다

봄꽃을 닮은 이름,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름, 잘 웃는 이름

주워도 주워도 주워지지 않는 이름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잠에서 깨면 그 이름을 잊는다고 엉엉 울었다

                - 짝꿍의 이름/ 박은지



가끔,

꿈속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세계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데 발이 땅에 붙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누군가를 부르려고 하는데 말을 잃어버린 목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고 다정했던 사람에게 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차가운 말을 들으며 울음을 참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의 목록 앞에서 눈이 감기지 않고 꼭 지켜야 하는 약속에 늦었는데 자꾸 잘못된 버스를 타고 지도에 나와있지 않은 길을 헤매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결말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가끔,

꿈속은 내 연약한 소망을 받아들여주는 세계인 것 같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던 발이 하늘 높이 튀어 오르기도 하고 그리운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하고 차가운 말을 걷어내고 진심이 다가오기도 하고 보고 싶지 않은 목록들이 지워지기도 하고 버스를 잘못 타서 시간에 늦었는데도 약속은 지켜져서 결국 '다행이야'는 말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결말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꿈과 현실은 서로에게 도달할 수는 없는 경계에서 등을 맞대고 보이지 않는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길고도 오래된 숨을 내뱉고 깊은 바닥에서부터 쌓여간 그 숨들은 경계로 스며들어 고정되었다고 착각했던 세계의 테두리를 조금씩 부드럽게 한다. 다행이다. 도무지 안 된다는 불가능한 결말에 빠져서 팔을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되는 때가 가끔씩은 있으니까.



<여름 상설 공연>의 시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흘러나왔거나 튕겨 나온 파편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꿈에 모두 담지 못하고 흘러나온 기억이나 납득되지 않아 경계의 모서리에서 부서진 파편들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의 곳곳에 웅덩이와 낭떠러지를 만들어서 슬픔과 절망을 옮기고 있었다.


시의 행과 연을 넘길 때면 계절의 대부분이 겨울인 머나먼 국경지역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서 내게 오는 동안 정작 전하고 싶었던 말들은 느리게 달리는 말의 발굽 사이로 빠져나가고 '빈칸'만 무수하게 남아버린 편지를 펼쳐들 때 나는 잊어버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졌다.



'갓 쏟아진 물' '무성한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라벨이 벗겨진 와인병이 바닥을 구르고' '반쯤 무너진 케이크' '검은 하늘 아래 검은 재가 가득' '검은 파도는 우리의 발까지' '햇볕이 닿기엔 너무 작은 창문' '꿈에서는 손이 불탔다' '어둠이 골목을 밀고 들어오면' (여름 상설 공연 중 발췌/ 박은지)

이미 일은 벌어졌고 절망이 그 뒤를 잇고 있는 듯한 꿈의 구석을 돌아다니는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쏟아진 물과 검은 재가 가득한 세상과 손이 불타고 어둠이 골목을 밀고 들어온 꿈에서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꿈속에서 이런 구절들을 발견했다.


'꿈에서 뭘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뒤틀리고 터져도 살아 있었고'(뜸하게 오늘)

'줍지 못한 이름이 없을 때까지/ 봄꽃은 봄꽃처럼 피어나고, 달리기는 달리기로 살아 있고, 웃음이 잘 지낼 때까지/ 낭떠러지가 사라질 때까지/ 낭떠러지를 지고 살기로 했다' (짝꿍의 이름)

꿈을 꾸는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 살아가는 도처에 낭떠러지가 솟아나고 그곳에서 떨어지는 이름들이 낭떠러지의 숫자보다 많더라도 그 이름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줍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현실이 악몽 같을 때가 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내뱉는 말들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워 담지 못할 비극이 쏟아진 다음 절망이 무거운 몸을 잡아끄는 진흙탕에서도 걸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다음 이정표가 보이지 않더라도 걸어야 하고, 그때마다 팔다리에 악착같이 붙어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무력감에 휩싸이는 순간들도 있다.

 평탄한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 소용없다는 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이 시들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는 <짝꿍의 이름>에 나오는 '줍지 못한 이름이 없을 때까지' '낭떠러지를 지고 살기로 했다'는 의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꿈과 시와 현실은 다르니 줍지 못한 이름이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이름을 줍고 낭떠러지를 지고 살기란 불가능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이름이 잊히지 않도록 계속 이름을 줍고 꿈에서 깨어나면 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도처에 널린 낭떠러지 앞에서 나의 이름도 떨어지고 마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럴 때 누군가 나의 이름을 주워주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악몽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절망을 내뱉는 대신 '생존수영'을 하기 위해 팔을 휘저을 힘이 생길 수도 있다.


'주인을 잃은 발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귀 기울이고 '밤이 전부 지나도록 받아 적'은 밤에는 눈이 내릴 것이다. 그럼에도 이름을 줍는 계절은 여름. 겨울과 봄이 오가는 경계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들을 찾아 나설 시간이다.


숲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던 밤 사람들은 창문을 숨기고 모든 불을 꺼뜨렸습니다 골목마다 라일락 향기 그렇게 여름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름/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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