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비밀이라는 건 대체로 이와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숨겨놓은 것도 아닌데, 눈에 띄지 않는 어떤 것들.”
비밀을 품에 안으면 차가울까 뜨거울까. 그걸 안은 사람의 계절은 여름일까 겨울일까. 어쩌면 모든 계절이 순식간에 몰아쳤다가 사라지고 있을까. 내가 안고 있는 비밀은 차가운 쪽에 가깝기를. 아직 동쪽으로 난 창은 일찍 밝아오고 해는 오랫동안 떠있고 얼음을 깨뜨려 먹고 싶을 정도로 후텁지근한 더위는 계속되고 있으니까.
자고로 여름은 더워야하고, 시골은 <전원일기>에 나오는 것처럼 이웃 간에 오가는 따뜻한 정이 넘쳐야 하고, 손녀를 대하는 할머니는 ‘우리 강아지’를 부르는 목소리에 깃든 애틋한 애정이 담겨있어야 하고 평온한 풍경은 비밀과는 거리가 먼 곳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근거도 연유도 없지만 막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자고로’라는 어휘가 휘두르는 힘은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강무순을 통과하면서 한여름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처럼 본래의 형태를 잃고 줄줄 녹아 흐른다. 어쩐지 ‘자고로’ 속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무게가 느껴지는데,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자고로 이러했다’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좀 더 들여다보면 ‘모름지기’와는 다른 뜻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자고로’는 ‘모름지기’의 휘장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것의 무겁고 넓은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기가 어렵다.
이 소설에 나오는 강무순은 ‘자고로’가 풍기는 존재감에 전혀 짓눌리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 그보다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스물한 살 강무순의 미스터리한 시골 여름나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고로’는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일 뿐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강무순이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명목상으로는 삼수생이지만 실제로는 공부와 담을 쌓은지 오래된 백수 강무순이 틀에 얽매이지 않고 편견이 없으며 호기심이 많으며 무엇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강무순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예로부터 이어져온 것에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비밀은 계속 비밀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무순은 생각과 동시에, 어쩌면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고 비밀에 다가갔다.
평온해 보이는 외딴 시골마을. 88올림픽 때도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다는 충청남도 운산군 산내면 두왕리 홍간난 할머니집에서 머무는 동안 강무순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추리 미스터리 소설이다. 복잡한 미로마다 엉켜있는 실마리를 무척 어려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본격적인 미스터리는 아니다. 미로 대신 가까운 이웃집과 시골 흙길, 늘 다니던 곳에 비밀과 비극이 숨어있는, 한마디로 우당탕탕 코믹 일상밀착형 미스터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드라마급으로 실감이 나고 공감이 되어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정신없이 빠져들어 피식거리며 웃다가 엉켜있던 비밀이 풀리는 순간부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모든 것은 강무순이 여섯 살 때 그렸던 보물지도에서 시작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족들과 함께 내려와서 사흘 동안 일을 도왔던 강무순은 늦잠을 잤다는 이유로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떠난 할머니집에 남게 된다. 늦잠을 자는 것은 죄가 아니건만 결정권 없이 당첨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 할아버지 없이 혼자 남게 된 홍간난 여사가 걱정된 가족들은 강무순을 그집에 남겨두기로 결정하고 떠난 것이다. 현금 오십만 원을 두고 안녕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걱정과 달리 홍간난 여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이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드라마를 보다가 잠이 드는 일상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홍간난 여사에게 당면한 문제는 오십만 원과 남겨진 강무순이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자고 하루종일 게으름을 피우고 집에서 키우는 똥개를 끌고 다니는 삼수생 백수 손녀. 그러니 할머니가 손녀를 가만둘 리 없다. 강무순은 늦잠을 잔다는 이유로 할머니에게 온갖 욕을 얻어듣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했다가 ‘말만 한 처녀가 개 끌고 다닌다고 미친년인 게’라는 소문까지 났다. 시골과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 한탄을 할 수밖에 없는 나날이 이어진다.
잠은 오지 않고 어디선가 여우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오는 한밤중, 강무순은 사랑방 윗목에서 ‘보물지도’를 발견하게 된다. 동생이 태어났던 해, 여섯 살이던 강무순은 이곳에 맡겨진 적이 있다. 보물지도는 그때의 강무순이 그린 것이다. 대체 보물이 묻혀있는 장소를 가늠하지 못하던 그때 홍간난 여사는 바로 그 장소를 ‘종갓집’이라고 지목한다. 앞으로 사건 해결이 크나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는 탐정 할머니다운 안목이라고 할까.
강무순은 보물지도에 그려진 종갓집을 찾아갔고 보물상자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상자 안에는 글자가 지워진 오각형의 배지 하나, 젖니 하나, 소년이 자전거 핸들을 잡고 서 있는 목각인형이 들어있을 뿐이다. 여섯 살이 생각했던 보물은 시간을 꼭꼭 씹어먹고 훌쩍 자라버린 스물한 살에게는 더 이상 보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물은 아닐지언정 비밀은 풀어야하는 법이고, 모든 비밀은 이 상자에서부터 시작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따분하고 잠잠한 시골마을은 사실 많은 비밀을 품고 있다. ‘특별히 숨겨놓은 것도 아닌데’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는, 혹은 그곳에 살고 있어도 외따로 떨어져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
15년 전, 이 마을에서는 하루 사이에 네 명의 소녀가 한꺼번에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그날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면 복 많은 삶을 살고 계시는 갑진 할머니의 백수 생일이었다. 특별한 날인만큼 마을 어른들 대부분이 관광버스로 해수욕 온천목욕을 떠났고, 해가 저물어 어른들이 돌아왔을 때는 네 명의 소녀가 사라진 뒤였다. 사라진 소녀들의 이름은 유선희, 유미숙, 황부영, 조예은. 특별히 친하거나 평소에 수상한 기미가 보였던 것도 아닌 소녀들에게 공통점이라면 실종되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강무순의 보물상자는 그들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도록 발판을 마련한다. 강무순은 보물상자를 계기로 종갓집 도련님 ‘꽃돌이’와 함께 사라진 소녀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모두 13장으로 이뤄진 소설의 각 장의 소제목도 재미있다.
예를 들면 제1장은 <여름, 슬프거나 말거나 턱이 빠지도록 호박쌈 한입>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제목이고, 제8장은 <여름, 남량특집하는 밤에 수박은 곤란하지>는 강무순과 꽃돌이가 사건을 파헤치면서 사실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던 것들에 대한 반전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제목이다.
각 장은 사건이 벌어진 마을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그려내는 것 외에도 비밀을 품고 있는 이웃에 대한 단서를 무심한 듯 툭 던져놓는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터뜨려놓은 듯 산만한 것 같으면서도 결말을 향해 일정한 걸음걸이로 나아가고 있다. 비극을 품고 있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강무순과 홍간난 여사의 강력한 케미 덕분이기도 하다. 극의 초반부터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은 독자를 이야기의 세계로 강력하게 이끌고 있다.
장과 장 사이에는 <주마등>이라고 이름 붙인 짧은 이야기가 총12장 들어있다. 하나의 장이 끝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마등'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나레이션을 한다. ‘주마등’의 나레이션을 누가 하는지 실종사건의 어느 인물과 연관되어 있는지 추리를 해보는 재미가 있으니 책을 미리 넘기지 말고 순서대로 읽는 것을 권한다.
비밀과는 거리가 먼 지루한 시골마을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비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들마다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숨을 토해냈을지 궁금하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품고 있던 비밀은 차가웠을까 뜨거웠을까. 아직은 여름이고, 해마다 여름은 늘 새로운 온도로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