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공급이 멈추는 날이긴 했지만 아침부터 꽃을 들고 거리로 나선 남자는 나 밖에 없었다. 꽃의 이름은 정확히 모르지만, 작은 꽃잎에 감도는 노란빛에서 애처롭고 소박한 정취를 풍기는 게 말 그대로 ‘여름 꽃’이었다. 폭염 속 땡볕에 노출되어 있는 묘비에 물을 뿌리고, 꽃들 두 다발로 나누어 좌우에 꽂았다. 어쩐지 묘지가 싱그러워지는 느낌이 들어 잠시 꽃과 돌 사이에 시선을 떨구었다.
-<여름 꽃> 중
무더운 여름날, 쇼조는 아내의 무덤에 꽃을 바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박하고 작은 여름 꽃. 밤마다 사이렌이 울리고 공습에 대한 공포가 쌓여가는 곳에서도 여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흘러간다. 쇼조는 꽃을 바친 뒤 향을 피운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주머니 속에 향내가 남는다. 평온한 여름의 마지막 냄새.
이틀 뒤 아침,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반짝이고 세상이 뒤집힌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이야기가 현실이 된다. 집은 무너졌고 땅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나무가 부러지고 일기예보에는 없었을 회오리바람이 지나간다. 깨진 유리와 무너진 집들 사이로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바쁘게 피난을 가다가 도움을 주는 이도 있지만 다수는 지나친다.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에도 급급하기 때문이다. 강을 향해 서둘러 가는 길에는 피부가 까맣게 타고 일그러지고 뭉개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원래 얼굴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화상이 심각하다. 목이 말라요.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낸다. 밤새 신음소리가 들린다. 모두 어딘가에 망가진 몸을 눕힌다. 아침이 되면 신음소리가 대부분 사라져있다. 죽음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거두어가며 숨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목숨이 꺼져간다. 애도할 눈물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은 빈번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이 말라간다.
<여름의 꽃>은 하라 다미키가 피폭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처음에 알라딘 ebook으로 읽었는데 앞뒤 상황이 빠진 중간의 이야기만 있어서 피폭 체험이 모두 담겨있는 <괴멸의 서막> <여름 꽃> <폐허> 3부작 전체가 있는 버전으로 다시 읽었다.
작가는 아내가 병으로 죽은 뒤 히로시마에 있는 고향집에서 머물다가 원자폭탄 피해를 입었다. 그때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끔찍한 참상을 겪으면서 작가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원자폭탄이 어떤 고통을 남기는지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하라 다미키는 배고픔과 추위, 피폭 부작용 속에서 글을 썼고 1951년 책으로 냈다. 그리고 두 달 뒤 자살했다. 철로에 몸을 눕히고서.
<괴멸의 시작>에서는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공습경보가 많아지고 학생들은 공장에 동원되어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출퇴근을 한다. 곳곳에서 건물 철거가 이루어지고 군인과 경찰이 감시가 강화되는 등 불길함이 감도는 마을. 주인공 쇼조는 아내가 죽은 뒤 고향에 내려와서 봉제공장을 하는 큰형의 일을 조금 돕는 외에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쇼조는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정부에서 공습을 피하기 위해 강제로 철거해버린 건물들을 보면서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공습경보에 떠난 피난행렬 속에서도 <헤르만과 도로테아>에 나오는 피난민을 떠올린다.
겪어보지 못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어떤 시야는 좁고, 때로 마음은 어리석다. 쇼조의 작은 형은 집이 철거되면 보상금을 받지 못하지만 피격당하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기도까지 한다. “하나님, 부디 3일 이내에 히로시마에 공습이 있게 해주세요.” 형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집은 부서졌고 잃어버렸던 아이는 죽었다. 자신들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돌이킬 수 없이 처참한 고통이 뒤따르는 기도라는 걸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빌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꽃>에서는 아내의 무덤에 다녀온 지 이틀 만에 원자폭탄이 터지고 쇼조를 비롯한 가족들이 피난을 떠나는 과정이 그려진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피폭 경험을 세세한 부분까지 되살려 표현하고 있다. 피난 연습은 실제 벌어진 현실에서 전혀 쓸모없었다. 손쓸 틈이 없었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그저 죽음을 피해서 도망을 갈 수 있을 뿐이었다.
지독하게 끔찍한 꿈이리라. 처음 머리에 가해진 충격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곧이어 정말 성가신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 내가 지르고 있는 괴성이 타인의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 주변의 광경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처참한 무대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분진 속에서 창백한 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점차 그 규모가 확장되어 갔다. 벽이 떨어져 나간 탓에 엉뚱한 곳에서 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름꽃> 중
‘회오리다!’
생각하는 찰나 강렬한 바람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변 초목이 모조리 흔들린다 싶었는데, 그대로 송두리째 뽑혀나가 하늘로 떠오른 나무도 많았다. 공중에서 미쳐 날뛰는 나무는 마치 화살처럼 맹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이때 주변 공기가 어떤 색을 띄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지독하게 끔찍한 지옥도에서 본 적이 있는 녹색 빛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여름꽃> 중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옆으로 팽창하는 은색의 허무한 확장 속에 거리가 있고, 강이 있고, 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살갗이 벌겋게 벗겨진 사체가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아주 세밀하고 정밀한 방법으로 실행된 새로운 지옥임이 틀림없었고, 여기에서는 인간적인 모든 것은 말살되었으며, 설사 사체에 어떤 표정이 있다 해도 모형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치환되어 버렸다. 괴로운 순간 버둥대다 경직된 몸뚱이는 일종의 묘한 리듬을 내포하고 있었다. 떨어져 나뒹구는 전선, 엄청난 양의 파편, 허무 속에서 경련이 이는 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런데 순식간에 전복되어 불타버린 전차와 거대한 몸통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말을 보고 있자니, 이것은 어쩌면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 속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일었다. 고쿠다이 절의 커다란 녹나무도 송두리째 뽑혀있었고, 묘석도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처마만 남아있는 아사노 도서관은 시체안치소로 변해버렸다.
-<여름꽃> 중
<폐허에서>는 피난 이후 버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 빛을 맞지 않았으며 상처를 입지 않았던 사람들이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코피를 쏟고 죽어가고, 치료와 배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병과 싸우며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생활. 죽음 이후에 닥쳐온 또 다른 죽음과 앞날을 알 수 없는 미래와 아득하게 멀어진 과거의 풍경들.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태어났고 사람들의 삶은 이어졌다.
어둡고 서늘해진 길이 길게 펼쳐졌다. 어딘가에서 시체 냄새가 날아왔다. 이 주변은 집에 깔려 죽은 사체가 셀 수 없이 많아서 구더기의 온상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검게 타 버린 이곳은 음산하게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때 아기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점점 또렷이 들렸다. 기세 좋고, 서글픈, 그러나 무엇보다 청초한 소리였다. 이곳 주변에는 벌써 사람들이 정착해서 삶을 꾸려나가는구나. 아기마저 태어나기 시작했구나.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깊은 곳을 아프게 찔렀다.
-<여름 꽃> 중
하라 다미키는 소설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비극과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린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고스란히 담았다. 소설 속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나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확장된 역사관 속에서 그에 관한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하라 다미키는 일본이 전쟁에 중독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당시 일본에 있던 한국인 7만 명이 피폭, 그중 4만 명 사망, 3만 명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피폭은 대물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고통스럽다. 시간이 흘러도 고통의 터널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고통은 배가 된다.
최근 일본에서 후쿠시마 오염수를 해양 방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폭발사고를 일으킨 후쿠시마 제1원자로 내에서 녹아내린 핵연료를 식히기 위해 주입한 순환 냉각수에 빗물과 지하수가 섞이면서 하루 140톤에 달하는 오염수가 날마다 발생하고 있어서 2022년 10월이면 저장탱크가 가득 차기 때문이다. 정화 처리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오염수에 포함된 방사선 물질을 완벽하게 걸러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바다로 흘려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방사능이 유출된 일본에서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것도 석연치 않지만 커다란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 방사능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단순화시켜 슬쩍 넘어가려는 태도에서 음습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희석하면 마실 수 있다’는 도쿄전략의 설명에 ‘마실 수 있냐’는 스가 총리의 반문. 스가 총리는 그 물을, 당연히 마시지 않았다.
소설을 읽고 떠오르는 머릿속 이미지는 실제 닥치는 현실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소설에서 비극은 글로 표현되어 장면으로 떠올리지만 현실에서는 떠올릴 시간 없이 곧바로 겪는다.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면 펼치지 말아야 할 이야기도 있고, 시작점을 누르지 말아야 할 결정도 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원자폭탄으로 인한 변화를 보세요/ 육체가 무섭게 팽창해서/ 남자도 여자도 모두 한 형체로 돌아간다/ 아아 이 흉물스러운 검은 숯덩어리/ 문드러진 얼굴의 부어오른 입술에서 새 나오는 것은/ ‘살려주세요’/꺼져가는 듯한 모기소리/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얼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