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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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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30. 2020

남매의 여름밤

기억을 소환하는 집

  <남매의 여름밤>은 옥주네 가족이 이사를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세대주택의 반지하에 살고 있던 옥주, 동주 남매는 아버지 병기를 따라 할아버지 집으로 향한다. 창문으로 쇠창살이 먼저 보이던 반지하와 달리 할아버지 집은 텃밭이 있는 오래된 이층집이다. 똑같은 형태로 지어져 대량 공급되었던 70년대 주택, 일명 불란서 집. 옥주는 이층에 있는 방을 골라 모기장을 치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다. 옥주네 가족이 이사를 온 뒤 고모 미정도 이곳에서 지내게 된다.

 적요했던 집이 북적거린다. 가족의 화목을 강조하는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북적거림 속에는 온기와 불안이 공존한다.

 반지하에서 나와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병기는 짝퉁 브랜드 운동화를 팔고, 미정은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친구 집을 전전하고 있던 상황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은 동주 외에는 모두 마음속 불안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 각본집에는 음식을 함께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조금 더 가까워진다. 처음으로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콩국수를 먹는다. 잡채와 조기, 비빔국수, 생일 케이크와 라면으로 이어지는 밥상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설정은 여름밤이다.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모기장이 쳐있는 방. 햇볕에 말라가는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 따뜻한 말이 오가지도 않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누구나 겪어봤을 추억 속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본집을 읽으면서 오랜 꿈을 꾸는 것처럼 아련하면서도 아늑해졌다.     

<남매의 여름밤>각본집 중

 나는 영화를 아직 못 봤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영화를 보는 대신 각본집을 읽었다. 감독의 말처럼 각본집은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백과 멈춤이 많다. 대사와 장면의 비어있는 공간을 더듬으며 영화의 속도와 인물을 향한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어느 가족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방식의 영화. 그 중심에는 가족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집’이 있다.      

 집과 집 사이를 떠돌며 생은 계속된다. 살다 보면 ‘이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겠구나.’라는 확신이 드는 지점이 있다. 그렇게 한 시절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나는 그 시절에 머물렀던 집을 떠올리곤 했다.


 <남매의 여름밤> 각본집을 읽으면서 나는 어릴 적 살았던 초록대문 집의 여름밤을 떠올렸다. 낡은 기억이 빛바랜 사진처럼 몇몇 장면으로 남아있다.

 여름밤이면 모기향을 피워놓고 마루에 모여 앉아 수박을 잘라먹었지. 콧등에 수박씨를 붙였다가 꽃밭을 향해 뱉으면서 내년에는 수박이 열릴 거라고 하며 웃었는데. 수박 때문에 한밤중 오줌이 마려웠지만 마당에 있는 화장실이 무서워서 괴롭게 참다가 결국 뛰어나갔지. 창문에 모기장을 붙여도 어디로든 들어오는 모기의 왱왱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어.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는 재로 사라지는 제 몸을 내려다보는 초록 모기향의 마지막 불씨가 남아있었지. 모기향 때문에 칼칼해진 목을 축이다가 나는 소리를 지르곤 했지. 모기가 눈을 물었어. 거울 속으로 퉁퉁 부은 내 눈을 보고 깔깔거리는 언니가 보였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지만 똑같은 장면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각자의 추억.     


 각본집에는 각본 외에도 포토 코멘터리, 촬영감독의 단상, 배우의 손편지, 이슬아 영화 에세이, 최원준 건축 에세이, 씨네 21과 인터뷰가 수록되어있다. 감독의 포토 코멘터리를 보면 주인공 옥주가 입은 티셔츠에 적힌 영문 문구를 언급한다.     


 “Love is so short, forgetting is so long.”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처럼 긴 것.’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나오는 문구.     


 윤단비 감독은 그 문구를 촬영을 할 때는 몰랐다가 편집을 하면서 보았다고 한다. 옥주 역을 했던 배우의 개인의상이었다. 감독은 ‘영화를 대변해 주는 것만 같은 문장’이라고 밝히며 ‘의도하지 않은 우연들이 영화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져 몇 번이고 글귀를 되뇌었다’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옥주와 여름밤 신중현의 ‘미련’을 듣는 장면은 각본에는 없다. 촬영을 하던 중 촬영감독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라고 한다. 각본집에 담긴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옥주는 이층 계단참에 앉아서 ‘함께’ 노래를 듣는다. 영화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커피 한 잔'을 틀어놓았다가 할아버지가 지닌 회환의 감정과 닿아있는 '미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어떤 집은 평생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는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았다가 그리움이 피어날 때마다 몇 번이고 소환된다.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체로서의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시간을 담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연결된다.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런 말이 자주 나온다. 우리 그 집에 살았을 때 이런 일이 있었잖아.


 내게는 ‘그 집’이 우리 가족이 아홉 해를 살았던 ‘초록대문 집’이다. 한옥과 양옥의 절충 형태로 지어졌던 집에서 여섯 명이 부대끼며 살았다. 따뜻했고. 차가웠다. 잊고 싶은 일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절대 잊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집을 통과했던 시간에서 얻은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매의 여름밤>에서는 여름 한철을 보낸 할아버지 집이 그런 집이 아니었을까. 고단하고 피로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시간을 담을 수 있는 집이 있어서 울고 싸우고 부끄러운 짓을 해도 다시 웃으면서 털어내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한때 동네에서 제일 잘 살았을 것 같은 구옥’을 염두에 두고 두 달 동안 장소 헌팅을 했다. 그런 중에 인천에 있는 낡은 이층 불란서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때는 빛나고 화려했던 집이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대에 뒤떨어지고 초라하게 변해간 집. 할아버지의 집은 그런 이미지이다. 가족들이 태어나 성장하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동안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언제라도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집.     


 잔나비는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으로 노래했지만, 옥주와 동주는 다르게 노래할 수 있을 것 같다. ‘뜨거운 여름밤이 가도 그 시절의 추억은 따뜻하게 남아있고’라고. 여름밤을 보냈던 집을 가끔 꺼내보며 단단해지고 행복에 가까워지기를.     



 부산국제영화제, 노트르담 국제영화제, 뉴욕 아시아 영화제 등 유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은 영화이다. 기억을 환원하는 영화를 보면 부유하는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끼게 된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기회가 없다면 집에서 보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감독은 처음에 <이사>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영화 촬영을 진행하면서 주제가 축소되는 것 같아 <남매의 여름밤>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영어 제목은 이동과 변화에 더 중점을 둔 <moving on>이다.

<남매의 여름밤>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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