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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04. 2020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설계도를 고치며 건축을 완성해가는 과정

 정주하는 인간에게는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 낮의 뜨거운 열기와 밤의 어둠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공간. 생존과 생활을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을 건축은 시대를 건너면서 다양한 목적과 필요를 담으면서 점점 풍부해졌다. 먹고사는 일의 편의를 확보하면서 집 이외의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곳곳에 심어둔다. 안과 밖의 투명한 경계를 이루는 유리창의 위치와 방향, 집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거실과 밖을 향하는 내부의 공간인 베란다도 그에 속한다. 수요에 맞춰 비슷한 구조로 설계되어 공사가 진행된 아파트는 그런 점에서 감성이 부족하다. 처음부터 딱 들어맞아 나머지가 없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살면서 이리저리 끼워 맞춰 볼 여지가 없기 때문에 오래 살아도 집 자체에 정이 들지 않는 것일까. 내가 살고 싶은 집은 계산되었지만 계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머지가 붙어있어서 한숨 돌릴 수 있는 구석이 남아있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을 아주 오랫동안 읽었다. 장마가 계속되던 여름에 처음 시작했었는데 시월이 된 지금에야 끝났다.  비가 세차게 몰아치던 날,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빌렸다가 한 페이지도 못 펼쳐보고 반납했다가 뒤늦게 막바지 더위가 찾아왔을 때 다시 한번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그때는 50페이지를 못 넘기고 기한을 넘겨 도서 연체가 된 채 반납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9월 중순쯤 빌렸다가 책상에 올려두고 다른 책만 읽고 있다가 추석 연휴에 다시 처음부터 조금씩 읽기 시작해서 반납 기일인 오늘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다 읽었다.


 건축학과를 갓 졸업한 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가 도쿄의 아오야마에 있는 설계사무소와 여름이면 사무실이 옮겨가는 가루이자와의 여름별장에서 무라이 슌스케, 그리고 사무소 사람들과 보낸 일 년의 세월에 대해 회상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도쿄 사무실에서의 일은 간략하게, 여름별장에서 있었던 일은 아주 세세하게 풀어간다.

 언제쯤 소설을 판가름할 굉장한 사건이 전개될까 기다리고 있는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참을성이 부족한 독자임을 어김없이 증명하고야 마는 나는 책의 절반에 다가가도록 접을까 말까 망설였다. 내게는 마음의 여유나 인내심이 없으니 섣부르게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어서 내어주라는 못된 심보가 있었으니 소설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스플룬드의 '숲의 묘지'가 나오는 장면부터 소설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지루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세밀한 묘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증기가 정상에서 희미하게 올라오고 있는 활화산 아사마 산, 여름별장에 들어설 때의 인상과 내부구조에 대한 설명, 주변에서 자라를 풀과 나무들의 색깔과 바람에 스치는 소리, 검은개똥지빠귀와 박새들에 대한 추억뿐 아니라 여름별장이 세워진 마을의 역사와 그 별장에 머물고 있는 고객이자 오래된 친구들, 무라이 슌스케의 젊은 시절과 스톡홀름 시립도서관과  아스플룬드에 대한 이야기까지. 빈틈이 없이 가득 차 있는 활자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머릿속에 장면을 새겨 넣었다.

 

 숲의 묘지에 돌을 깐 긴 진입로는 의지를 지니는 인간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전제로 곧게 깔려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어쩐지 성경의 '예약'이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신과 인간의 일대일 관계는 직선으로 맺는 것이 어울린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숲의 묘지가 소설에 자주 등장하며 깊이 관여하는 것은 무라이 선생의 설계와 대조적인 면을 이루면서 선생의 마지막에 대한 암시라고도 볼 수 있다. 선생은 진입로를 광장으로 만들어 현대 국립도서관의 입구를 한정 짓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에서 주인공이 읽고 있는 숲의 묘지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일직선의 진입로만 존재한다. 생의 설계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다만 삶의 마지막은 아무도 설계를 정해둘 수 없으며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숲의 묘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건축가 아스플룬드도 자신이 설계한 묘지에 화장되어 묻혔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을 위한 대비는 할 수 있지만 정확한 때를 알지 못해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못하는 점은 늘 슬프다.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고 완벽하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가능할 리 없건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이 소설에서 마침표에 대한 슬픔과 아쉬움이 더 드는 지점은, 아스플룬드는 설계를 건축으로 완성시켰고, 무라이 선생은 현대국립도서관의 설계를 완성시켰지만 건축으로 옮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그렇게 악취미로 생각되던 니시하라 캐티드럴 성 베드로 대성당도 지금은 주변 풍경의 중심이 되고 조용한 침착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사람과 시간이 그 대성당을 키운 것이다.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대로 흘러, 지나간 세월은 이 모형에 사소한 숨결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플랜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선생님 플랜에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여름별장은 1950년대 세워졌고 주인공이 그 별장에 처음에 발을 들인 때는 1982년.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십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이를 먹은 주인공 사카니시가 여름별장 이후의 일들에 대해 짧게 설명하며 끝을 맺는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는 닫혀있던 감정이 소설이 끝을 맺을 때 가 되어서야 내게 와서 부딪쳤다. 시작과 끝이 긴 시간 차를 두고 맞물려있다.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보다는 한 편의 영화를 봤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같은 장소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찾았을 때 닥쳐오는 막막한 그리움이 화면을 뚫고 아릿하게 전해진다.


 노란 잎에 감싸인 여름 별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저녁이 되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오래된 장작이 다 탈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난 구석이 없다.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며 완벽하지 않지만 충실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쌓은 시간들은 견고하고 여유롭다. 삶의 설계도는 완벽하지 않다. 큰 틀과 방향성을 갖춘 다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넘치는 부분을 줄여가며 설계도의 도면을 고쳐나간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완벽한 설계도는 손에 쥐어지지 않겠지만 삶의 중심이 단단한 땅에 깊이 뿌리박고 서면 바깥과의 조화는 맞춰나가면 될 것이다. 바람과 햇빛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창을 내고 자연의 변화에 맞는 지붕을 덮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미는 마음의 온도에 따라 손잡이의 형태도 현관까지 오르는 계단의 굴곡도 달라질 것이다. 삶은 각자에게 주어진 설계도를 그렇게 조금씩 고쳐나가면서 '나'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시키고 있는 과정이다. 혼자 있어도 고독에 꺾이지 않을 삶을 지키고 싶다면 내면 설계에 힘을 더 써야 할 것이다. 설계를 고치고 다듬어가는 시간 속에서 잘못된 선을 긋지 않기 위해 내 자신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후지사와가 원예를 하며 느끼고 알아갔던 점들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좋다.


"그게 재미있는 점인데 뻔뻔한 꽃에 한 해 줄기나 잎사귀는 패기가 없어요. 줄기에 맥이 없거나 잎사귀와 잎사귀 사이가 이상하게 휑하거나 뭔가 전체적으로 감칠맛이 없고 힘이 없지요. 꽃이 에너지를 다 뺏어간 것처럼. 큰비라도 내리면 제일 먼저 고개를 숙여버리고, 한 송이만 잘라서 꽃병에 꽂으면 그 순간 의기소침해진 것처럼 생기가 없어지죠. 뻔뻔한 꽃들은 떼를 지어요. 고독에 약하지."


"팬지에 남겨진 것은 비올라 트리컬러의 꽃잎 구조뿐이고 원종이 갖고 있던 기품은 완전 훼손됐어요. 품종개량을 한 사람들이 조금만 센스가 있었으면, 원래의 유래를 훼손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그런 게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남기는 나의 한 줄 감상평은 "삶은 내게 주어진 설계도를 고쳐가며 건축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읽은 책을 이제 도서관에 반납하러 가야겠다. 바람이 쌀쌀하니 두꺼운 스웨터를 겹쳐입고 어둑한 산 그림자를 업고 있을 도서관으로 가서 무인반납기에 쏙 밀어 넣고 여름별장이 남긴 것들을 천천히 떠올리며 시간을 들여 밖을 걸으며 안을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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