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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Sep 19. 2020

여름의 빌라

빛 속에 고인 시간의 궤적

 아무리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더라도 시간은 흘러가고,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이어지다가 결국 고요한 소멸로 향하면서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들을 때면 재빨리 고개를 끄덕여 이 단순한 말을 현실로 받아들여 아픔 같은 건 잊어버리고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만 붙잡고 싶다가도 동시에 지금 고통의 터널을 지나더라도 묵묵히 걸어가면 환한 빛이 쏟아지는 바깥이 나타나면서 모든 고통은 사라지게 될 것이니 현재의 감정에 너무 매달려서 괴로워하지 말라는 긍정의 메시지에 반문하고 싶었다.

 왜요? 터널을 지나는 고통은 각자 색깔과 무늬와 패인 자국, 시들거나 썩어가는 정도가 모두 다를 것인데 그 한 문장으로 정리가 가능할까. 고통은 사물이 아닌 사람에게 깃든 감정인데 고통에 매달리지 말라고 해서 싹둑 잘라내어 버릴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잖은가. 얼룩진 심장에 귀를 갖다 대면 알 수 있다. 평온한 얼굴 아래에서 한번 다친 심장이 얼마나 크게 요동치다가 숨죽이기를 반복하는지를.


시간이 흘러 빛 속을 걸어갈 때도 터널 속에 있었던 나의 일부는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형체를 파악하고 무게를 가늠하고 깊이를 재어내어 고통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는 사이 나의 일부는 더 많이 지금의 나에게로 건너오고, 아무리 해도 가벼워지지 않는 고통의 일부를 삼키게 될 것이다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속에는 평온한 얼굴로 시간을 지나쳐온 '나'와 지나온 시절에 머물러있는 '나'의 일부가 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지나치게 투명한 시간의 막을 통해 보고 있기 때문에 숨길 것이 없다. 누군가에게 받았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사실은 내가 했던 오해였으며 내가 호의로 베풀었다고 착각했던 선행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등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나에게 그 세계를 매듭지을 수 있는 시간을 내어준다.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은 현재의 나의 시선을 통해서 과거를 재조정한다.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한번 뱉은 말과 저지른 행동은 돌이킬 수 없으니. 다만 현재의 눈으로 과거의 나를 보는 행위는 무지하고 미성숙한 나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낸다. 빛이라고 오독하며 읽었던 과거를 조각내어 다시 맞추어보는 노력을 하면서 조금씩 무지와 미성숙에서 벗어난다.


 <여름의 빌라>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 단편마다 지나온 어느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에 수록된 '시간의 궤적' '여름의 빌라' '폭설' '흑설탕 캔디' 등 4편은 이미 읽었기 때문에 나머지 4편을 위해 책을 사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샀다. 이번에 처음 읽은 소설은 '고요한 사건'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아주 잠깐 동안에'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이다.

 소설 속 배경은 모두 여름이다. 이렇게 여름을 배경으로 쓰는 것도 대단하다 싶었는데, 작가의 문장이 여름과 잘 어울린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여름의 정오' '높은 물때'도 여름이 배경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시작되고 맺어지다가 갈라지고 끊기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중층적 의미를 겹쳐둔다.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기차를 타고 가는 주아가 베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스물한 살에 베를린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던 주아는 그곳에서 만난 독일인 부부와 가까워진다. 겨우 사흘 동안 머물렀지만 그 후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된다. 세월이 흘러 시간강사를 전전하며 남편 지호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주아는 독일인 부부로부터 여름휴가를 시엠레아프에서 함께 보내자는 연락을 받는다. 독일인 부부 한스와 베레나는 다섯 살 손녀 레오니와 함께 있었다. '여름의 빌라'라고 이름 지은 숙소에서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먹고 마시고 쉰다. 그러닥 여행 마지막 날 수상가옥에 사는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이견으로 지호는 독일인 부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낙천적인 걸까?"

 한스가 말했습니다. 화제는 이제 그날 보았던 거리의 풍경으로 옮겨갔습니다. 흙탕물 속에서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던 어린아이들이나 거리가 물에 잠겼는데도 테이블을 밖에 내놓고 조명을 밝힌 채 밥을 먹던 사람들에 대해서

 "불행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의 천성이 경이로워"라고 말한 것은 당신이었죠.

 "하지만 정말 이 사람들이 낙천적인 걸까요?"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마시기만 하던 지호가 불쑥 질문을 던졌습니다. 평범하게 들리는 어조였지만 나는 그 말속에 가시가 숨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미묘하지만 틀림없이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백수린 <여름의 빌라> 중-


  지호는 가난 때문에 구경거리가 되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관광객들 때문에 상대적 빈곤을 느꼈을 거라고 말했고, 한스는 수상가옥과 보이는 삶이 돈벌이 수단이라고 했다. 지호는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건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 뿐'이라며 독일인 부부를 비난했다. 다음 여행은 끝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뒤 주아는 편지를 받고서 독일인 부분에게 큰 고통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기차가 도착하기 전 주아는 어린 레오나가 돌멩이로 그린 커다란 네모집에 대해서 적는다. 그 마을에 사는 캄보디아 소년이 다가오자 경계를 지우고 소년의 뒤에 새로운 선을 그었던 레오나가 했던 말과 웃는 장면에 대해서.

 캄보디아나 동남아 여러 지역에 있는 수상가옥을 바라보는 시각은 각자 다를 수 있다.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약자의 모습으로 또는 일상의 모습을 노동으로 받아들이는 낙천주의자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레오나가 땅에 그린 선을 지우고 소년을 집안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 폭력의 태도를 취하는 지호와 이미 폭력의 희생양이 된 독일인 부부 사이의 긴장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경계를 허물고 받아들이는 레오나의 순수한 마음을 세계에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일상에서 수없이 겪는 경계에 대해서 조금쯤 순해지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여름이 배경인 이유도 있지만 작가의 투명한 시선과 섬세한 문장 때문에 소설들은 엷은 초록빛을 띠고 있는 것 같다. 산동네에서 맞이하는 악취 속에서도 (고요한 시간) 그 시간에 냄새가 배지 않았던 것은 그런 빛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빛의 한가운데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고여버린 시간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 속에서 지난 시간 속에서 어쩔 줄 모르며 같은 곳을 맴도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나의 일부가 있는 그곳은 여전히 지나치게 밝거나 지나치게 어둡다. 이곳에 서있는 나는 더 오래 그곳을 응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좀 덜 무지하기 위해서, 좀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소설을 읽어서 좋았던 토요일 오후. 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숙해지면서 행복해지자. 남에게 상처 주면서 얻지 말고 스스로 노력해 얻은 행복으로 작은 관계 사이의 평화가 깨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 지키고 싶은 말, 행복하자.


   나는 내 앞에 남은 밥을 천천히 씹어 먹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건너다보았다. 창 너머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살이 접힌 채 해변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파라솔들은 불 꺼진 케이크의 초같이 보이기도 하고, 날개가 꺾인 새들같이 보이기도 했다. 잿빛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짙푸른 물결이 이쪽으로 다가오다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황금색으로 빛나던 장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파라솔의 몸체가 흔들렸고 이제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옅은 슬픔 같은 것이 가슴 안에서 서서히 퍼졌다.

           -백수린 <시간의 궤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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