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고양이 똥을 치우며
감자였다면 아마도 부농이 되었으리라. 거위가 낳은 황금알이었다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고양이 똥은 감자도 황금알도 아니다. 모양은 감자와 비슷해서, 똥이라 부르기 어려울 땐 감자라 부른다. 매일매일 새로 생긴다는 점에서 황금알과 비슷하지만 이것은 황금이 아니다. 황금빛을 띤 똥이다. 민들레 씨앗을 품은 똥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는 동화 속에서나 현실이다. 길 위의 똥은 버려진 현실일 뿐이다. 자기를 희생할 수도, 녹아들 땅도 없는 불운한 이 시대의 똥은 그저 쓰레기이다.
요즘 똥은 민들레 씨앗 대신 방부제를 품었다. 치우지 않으면 삭지도 않는다. 빼들 빼들 마를지언정 스며들지 않는다. 언젠가 읽었던 글 한 대목. 도시 아이들이 시골에 갔다. 시골 사람들이 똥을 거름으로 삼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똥은 기름진 것을 많이 먹어서 좋은 거름이 될 거라고 뿌듯해한다. 시골 노인이 한마디 한다. 도시 사람의 똥은 방부제 때문에 삭질 않아서 거름으로 쓸 수 없어 따로 치워야 한다고. 이 시대의 똥은 민들레를 키우지도 못하고, 거름으로 쓸 수도 없는 쓰레기다.
저녁이 깊어지면 고양이 똥을 치운다. 고양이들은 강아지도 아니면서 강아지풀을 유독 좋아한다. 강아지풀을 잔뜩 먹은 풀파티 날에는 삭지 않은 풀들이 똥과 뒤엉켜있다. 약을 먹는 고양이는 똥도 다르다. 다 흡수되지 않은 화학약품 탓에 시큼한 냄새가 난다. 그러고 보면 똥은 무엇을 먹었는가를 알고 있다.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주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요리사의 말대로라면, 똥은 나의 식탐을, 나의 탐욕을, 그리고 나를 알고 있다. 이 정도면 아주 쓸데없는 쓰레기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려나?
고양이는 똥을 스스로 처리한다. 화장실 모래 속에 묻는다. 흔적을 지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 살고 있으니 생존 본능이라기보다는 똥을 치우는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원초적인 영역에서 최소한의 예의만 갖출 수 있다면,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은 충분하다. 끝이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키기 어려워진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백세시대라는 말이 흔해졌다. 실감이 나질 않는다. 주변에 백세를 사신 분이 없거니와 오래 사는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겨우 숨만 쉬는 백세의 꿈은 허망한 욕망이 아닐까? 가끔은 얼마까지 사는 것이 적절할까를 고민한다. 백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류가 진화하는 것을 보여주려면, 적어도 부모님들보다 일 이년은 더 살아야 한다. 물론 정답은 아니지만 하나의 답은 된다.
똥을 치우면서 원초적인 예의를 생각한다. 원초적인 영역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수 있을 때까지만 살면 좋겠다. 고양이처럼 자신의 똥을 스스로 치울 수 있을 때까지, 식욕과 탐욕의 흔적을 깨끗이 묻어 악취를 풍기지 않을 만큼만 살면 좋겠다.
저녁을 준비하며 셰익스피어를 읽었다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는데, 고양이 똥을 치우면서 죽음을 생각한다. 어쩌면 고양이 똥은 단순한 쓰레기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