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24

18:00 저녁 설거지에는

by 김기원

설거지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설거지를 아는 사람은 사용한 그릇을 개수대에 넣을 때부터 다르다. 기름기나 음식물이 많이 묻었다면 배수구 근처에 그릇을 놓는다. 이런 그릇들은 다른 그릇을 오염시킨다. 기름기나 음식물이 적게 묻은 그릇이라면 배수구에서는 멀고 수도꼭지는 가까운 곳에 놓는다. 세제를 덜 쓰거나 안 써도 된다. 물론 물을 받아서 굳은 음식물을 불려 놓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반면 설거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 데나 무심하게 놓는다.

설거지를 아는 이라면 포개 놓지 않는다. 잘못 포개진 그릇은 진공상태가 되어 쉽게 빠지지 않을 때가 있다. 수저는 여기저기 흩어놓지 않고 한쪽에 가지런히 모아 놓는다. 여러 개를 한 번에 쥐고 씻어야 할 때, 흩어진 수저를 정리하는 과정은 성가시다. 물론 조리에 썼던 도구도 한 곳에 몽땅 넣지 않는다. 이차 오염을 막기 위해 따로따로 두되 물만 담아 놓는다. 설거지를 안다는 것은 배려이고 효율이고 절약이다. 그러니 설거지를 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현격하다.

설거지를 안다는 것은 은근한 즐거움을 아는 것이다. 무신경한 사람들이 어지럽게 놓은 그릇들이 개수대에 널려 있다. 쓱 한 번 훑어본다. 무엇을 먼저 닦을지 순서를 빠르게 정하고 동선에 따라 그릇을 재배치한다. 어수선하던 세계에 순서가 부여되고 혼돈의 카오스에 모종의 질서가 잡힌다.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한 즐거움이 있다.

다양한 소리를 알아챌 때도 있다. 배경 음악이 있더라도 다채로운 소리가 들린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쏴아 쏴아 물소리는 물의 세기나 모양에 따라 다르다. 거품을 내기 위해 수세미를 비빌 때 나는 크슥크슥 소리는 무슨 수세미인지, 얼마나 닳았는지, 물을 얼마나 머금었는지에 따라 다르다. 수세미가 내는 사아삭 사아삭 마찰 소리도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다르다. 개수대에서 부딪히는 그릇들의 덜그럭 덜그럭 소리도 재질이나 모양에 따라 다르다. 미끈거리던 그릇이 깨끗이 닦였을 때 나는 뽀드득뽀드득 소리, 행주를 빨 때 나는 찰박찰박 물 튀는 소리, 싱크대 물기를 닦는 행주의 스스슥 스스슥 소리, 배수구에서 나는 꾸러러럭 꾸러러럭 물 내려가는 소리. 서로 다른 소리들을 알아채는 즐거움이 설거지에는 있다.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역시 뽀드득 소리다. 더러운 과거는 잊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부활의 함성이다. 집에 있다고 늘 평온하지만은 않다. 바깥일은 바깥일 대로, 안의 일은 안의 일대로 깔끔하게 해결되는 않는 마음들이 있다. 안개 끼듯 흐릿할 때 듣는 뽀드득 소리는 마음마저도 다시 태어나게 해 줄 것같이 개운하다.

앞치마를 탁탁 털어 둘둘 말아 오븐 손잡이에 건다. 이제 부엌은 하루를 마쳤다. 잠든 아이 방을 둘러보듯 부엌을 둘러본다. 더러운 것을 닦느라고 너덜너덜해진 행주가 뽀송하게 마르기를, 들고 자르고 담느라 분주했던 수저가 반듯하게 서서 모든 물기를 털어내길, 크든 작든 생긴 것을 탓하지 않고 깜냥대로 음식을 품느라 분주했던 그릇들이 한가롭길 바라 본다.

불을 끈다. 눈동자에 어리던 불빛의 잔상마저 사라진다. 하루가 끝났다. 오늘도 모두 애썼다. 존재한다는 것은 애쓰는 날들의 연속이다. 서로가 있어서 오늘도 무사했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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