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23

17:00 저녁은 해결되었지만 해결되지 않은

by 김기원

색다른 맛을 느끼는 것은 일상에서 만나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음식은 맛으로 먹고 추억으로 기억되기에, 색다른 맛은 특별한 날, 특별한 상황에서 먹을 때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삿날 먹는 짜장면, 졸업식날 먹는 탕수육, 장맛비 오는 날 먹는 부추전, 소풍 가서 먹는 김밥, 기차에서 먹는 달걀과 사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날 쉽게 먹는 맛은 일상일 뿐이다. 호텔 뷔페가 늘 저녁이 된다면 특별함은 그 자리엔 없다.

저녁을 준비한다. 색다른 맛을 준비하고 싶지만 한계가 있다. 다만 익숙한 것이라도 색다르게 먹으려고 애쓸 뿐이다. 조금이라도 색다르게 먹으려면 먹는 주기가 길어야 한다. 기억마저 희미해질 무렵이면 익숙한 맛도 조금은 색다르다. 제철 음식을 먹는 것도 색다르게 먹는 방법이다. 제철은 일 년에 한 때, 한정된 기간이라 대개는 일 년 주기다. 주기가 길어서 제철 음식은 먹을 때마다 새롭고 특별하다. 농업 기술이 발달해서 제철이라는 말이 어색해졌다. 겨울에도 딸기나 수박을 먹는다. 기다림이 없다면 만남은 특별하지 않다. 제철도 사라지고, 소소한 색다름도 사라진다.

사라져 가는 것은 제철만은 아니다. 한 끼, 한 그릇에 담긴 온기도 사라지고 있다. 분주하게 준비하고, 싹싹 긁어먹어야 할 끼니가 이제는 해결해야만 할 문제가 되어 간다. 4인분도 부족했던 때를 지나 2인분만 조리해도 남는 때를 거쳐, 때때로 1인분만 필요한 식탁에서는 분주하게 준비할 것도, 싹싹 긁어먹을 일도 없다. 먹는 일에 담긴 따스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포장 배달 외식이 기다린다. 먹는 문제를 해결해서 너무나 감사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늘 남아 있다.

기본 4인분 시절에는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있는 이웃이 있었다. 양육 정보도 공유하고 음식도 자주 나눴다. 양 조절에 실패한 반찬도, 갓 담근 김치도, 솜씨를 발휘해 만든 요리도 조금씩 나눴다. 한두 가지만 나눠도 배가 되는 식탁의 기적이 있었다. 반찬 가짓수가 늘어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늘 먹던 재료를 색다르게 먹는 것이 좋았다. 나눠준 멸치가 멸치볶음으로 돌아올 때, 집에서는 넣지 않는 아몬드나 고추장 또는 꽈리고추가 들어 있었다.

바깥 양반이라는 이름이 있을 때나 온전한 집사람이 된 때나, 저녁을 해결하는 것은 여전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포장 배달 외식으로 해결하지 않을 때는 인터넷을 뒤진다. 최적의 맛을 내는 조리법이 인터넷에는 널려있다. 일러준 대로 재료를 사고 다듬고 조리한다. 포장 배달 외식이 아닌 것이 어디냐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긴다. 조립법만 보고도 상상한 맛을 구현해 낸 것이 기특하다. 배부르고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도 그저 저녁을 해결한 것만 같다. 일상의 맛이라도 특별하게 먹어줄, 달그락달그락 아이들의 숟가락 소리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평범한 재료도 색다르게 만드는 이웃집 집사람의 손맛이 없어서일까?

오늘도 저녁은 해결되었지만 해결되지 않는 무엇이 식탁 위에 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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