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22

16:00 집으로 가는 길

by 김기원

집으로 간다. 매번 가는 길이지만 매번 걸리는 시간은 다르다. 발걸음을 멈출 만큼 하늘이 예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더 걸린다. 부슬부슬 비가 오거나 땅만 보며 걸음을 재촉할 때는 덜 걸린다. 더운 날에는 땀나지 않게끔 최대한 천천히 걷느라 꽤 걸린다. 볕이 쨍쨍한 날에도 그늘만 찾아 걷느라 더 걸린다. 가끔은 자전거도 탄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유 자전거를 이용하면 시간은 절반으로 준다.

집으로 간다. 매번 가지만 늘 조금씩 다른 길로 간다. 여름에는 자작나무가 있는 길로 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가지를 쫙 펼치기에는 넉넉지 않은 곳에 자작나무가 서 있다. 보는 것만으로 서늘해지는 자작나무의 껍질을 보며 잠시 쉰다. 보는 이야 시원하지만 정작 자작나무는 많이 지친 듯하다. 서늘한 곳을 좋아해서 깊은 산골에서야 활개를 펼치며 사는데, 어쩌자고 아열대에 가까운 도심에서 웅크린 채 서있다. 겨우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지친 듯 잎이 늘어져 있다. 발이 없는 나무라도 서 있고 싶은 곳은 있을 터이고, 말할 입은 없더라도 가고 싶은 곳은 있으련만, 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자작나무는 그저 잎만 떨구고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기특한 바람이 분다. 애를 써도 멈추지 않던 땀을 순식간에 식혀준다. 마치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다. 아스팔트가 땅인 곳에서는 건물들이 산이다. 자작나무가 늘어진 손을 살랑인다. 바람에 응답하듯 차츰차츰 격하게 흔든다. 무엇이 생각난 것일까? 잊고 있었던 오래 전의 기억, 인적 드문 깊은 산골 어디쯤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던 그날을 떠올렸을까? 시베리아 너른 벌판 북풍한설쯤이야 아랑곳 않고 꼿꼿했던 그날을 기억했을까?

바람이 식혀준 땀이 더워지기 전에 걸음을 옮긴다. 아이스크림 할인점을 지난다. 여름이면 종종 들른다. 수영하는 내내 수영장 물을 다 마실 듯이 먹었지만, 뜨거운 날엔 금세 목이 마르다. 손에 집히는 대로 몽땅 먹어 주겠다는 의욕으로 문을 열었지만, 막상 아이스크림 앞에서 멈칫한다. 너무 다양하다. 아이스께끼의 전통을 잇는 막대형 아이스크림, 비닐로 된 모양에 들어 있는 빨아먹는 아이스크림, 용기에 담긴 떠먹는 아이스크림, 과자 위에 얹힌 콘류의 아이스크림, 과자 속에 든 아이스크림, 고깔 모양 종이에 담긴 아이스크림 등 모양의 무척이나 다양하다. 모양만큼 맛도 다양하다. 결정을 내려주는 기계 빨리 나오기를 바라며 결국 익숙한 것을 집어들었다. 조그만 얼음 알갱이가 들어 있는 고깔 모양의 청포도맛이거나 네모 막대 모양의 멜론맛이다. 이게 뭐라고 새로운 맛에 도전하는 일은 여전히 용기가 필요하다.

계산대로 간다. 기계가 정확한 발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인사성이 밝은 것에 비하면 성품은 좀 그렇다. 아무리 봐도 어린것 같은데 사람을 시켜 먹는다. 그것도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어쩔 수 없이 바코드를 읽히고, 카드를 넣는다. 카드를 잘 챙기라고, 다 쓴 바구니는 제 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그리고 잘 가라고 끝까지 밝고 명랑하게 명령한다. 아무리 기계라도 명령을 잘 따라야 한다. 허투루 들었다간 먹고살기 복잡해지는 시절이다.

문득, 먼지 뽀얀 판매대에 앉은 파리를 쫓다가, 파리채를 들고 꾸벅꾸벅 졸던 구멍가게 털북숭이 아저씨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손님을 맞던 낡은 가게들은 지금도 안녕할까? 물건 값보다 가족의 안부를 묻느라 더 바쁜 아주머니는 지금도 여전하실까? 말만 잘 들으면 기계가 있어서 생활은 편리해지는데, 왠지 한 켠에선 휑한 바람이 분다.

낡고 털털하게 웃는 아저씨의 구멍가게에 가고 싶다. 깎아 주고 얹어주고 외상으로도 주던 구멍가게에서, 자세히 봐야 무슨 모양이지 겨우 알 수 있는 아이스께끼를 먹고 싶다. 더러는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을 일그러진 모양의 아이스께끼를, 과일 없는 과일맛 아이스께끼를 먹고 싶다. 막대기까지 핥다가 빨다가 씹어서 마지막까지 남은 한 방울까지 알뜰하게 먹고 싶다.

얼음 알갱이를 씹으며 자작나무와 내가 가지 못할 곳을 떠올리며 집으로 간다.


정식 버전 퇴직 후에는 자전거를 더 많이 이용한다. 가는 길이 달라지니 자작나무 그늘을 보며 쉬는 일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도 줄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듯, 장미덩굴 우거진 내리막 길을 가는 즐거움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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