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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Jan 03. 2024

병들었다



어제 우연히 허수경 시인의 시 한 편을 읽게 되었다. 너무 좋아서 이틀 동안 여러 번 읽다가, 오랜만에 필사를 했다. 고등학교 때 밥 먹듯이 하던 필사를 하니 한 글자 한 글자가 더 깊이 다가왔다. 요즘의 내 마음, 이 시대의 마음들 같았다.



말하자면 한없이 길어져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사회가 병들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남을 들추고 구경하고 심판하고 조롱하고 혐오한다. 이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스스로가 구경과 혐오를 일삼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무감각하다. 내게 이런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초등생들도 학교에서 조롱과 심판과 혐오를 예습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학교는 처벌을 택한다. 왜 그런 태도가 옳지 않은지,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갉아먹을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남들이 하니까 하고 재미있으니까 하는 아이들은 그것의 밑바닥에 무슨 마음이 있는지 잘 모른다. 생각보다 잘 모른다. 그러니 알려주고 이야기해야 한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지나친 금연교육으로 초등생이 담배 성분을 줄줄이 외우고 다니는 시대. 정작 아이들의 내면은 쭈그러든다. 팽팽하게 자라도 모자랄 시기에 나쁜 것부터 예습한다. 그런데 그게 나쁘다는 것도 모른다. 초등학교가 이렇다면 상급학교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와중에 학교 담임선생님의 알림장이 왔다. 반아이들 모두가 받아쓰는 알림장을 선생님은 매일 학부모에게도 전달해 준다. 거기엔 이런 말이 있었다.



타인의 잘못과 실수는
따스한 마음으로 안아주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아마 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무슨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일은 언제든지 생긴다. 그러나 이런 배움은 너무 중요하다. 아이들은 타인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아주 오랫동안 연습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까스로, 이 시대의 어른들과는 다른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아주 지겹게 듣고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부디 잘 지내길.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 허수경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것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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