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에 아이를 낳고 나는 사실 대부분의 날을 마음으로 싸우며 지냈다. 멍청한 모성신화에 함몰되었다가 깨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를 주장하기도 어린 나이에, 자기만 주장하는 어린 아기를 마주했다. 나는 자주 화가 났다. 아이가 예뻤나. 예뻤겠지. 생각해보면 멍청한 모성신화에 빠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지난 여름 친구와 했던 이야기들도 그런 맥락이었다. 자칫하면 아이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나는 일부러 쿨한 척을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아이말고도 내게 중요한 것은 많았다.
그사이 아이들은 훌쩍 자랐다. 아이들의 성장이 확 와닿은 것은 아마 작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은행나무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언제 이렇게 자랐나 묻다가 금세 아이들의 시간이 아까워졌다. 아이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무심한 척 지내온 시간들이 비로소 끝에 다다른 걸까. 더이상 나는 쿨한 시늉을 할 수 없게 됐다.
아이들은 날마다 사랑스럽고 날마다 예쁘다. 내가 보고 싶어 실내화를 신고 집으로 달려오는 아이를, 별 것 아닌 젤리를 보고 엄마아 하고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를, 들려주고 싶은 말들을 순서대로 내뱉느라 바쁜 그 입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뻐근하다. 나는 여전히 그 넘치는 사랑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는 더 웃고 더 자주 사랑을 고백한다. 지난 날들, 멍청한 모성신화에서 버티려고 해왔던 그 날들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날들을 후회하는 게 사실은 맞지 않다. 얼마전 친한 친구와 했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돌아가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것, 이제 막 아이를 낳고 기르는 주위를 보면서 우리는 이 나이에 낳았어도 똑같았을 것이라는 게 그것이다. 어찌보면 우리끼리 하는 합리화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큰 위로가 된다.
나는 이제 멍청한 신화로부터 빠져나와 비로소 나다운 엄마가 되기로 한다. 시시때때로 사랑을 고백하고 아이를 내 삶 한가운데에 놓는 것이 모두 그 신화 속에 갇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를 주장하는 사이 아이들도 성장했다. 내 염려보다 더 단단하게 자라는 아이를 보며 감동한다. 늘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힘든 것은 힘든 것, 좋은 것은 좋은 것. 철저히 다르다.
아이는 지우개를 매일 부러뜨린다. 연필도 어느 의자 구멍에 넣어 쑤시는 게 분명하다. 영어학원 숙제는 알파벳이 지멋대로 뛰논다. 괜찮다. 그것을 보고 괜찮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나의 성장을 느낀다. 그동안 쿨한 척 하느라 인색하게 굴었던 마음의 표현들을 더 늦기 전에 다 쏟아내야지. 혼자 학교 교문으로 달려가듯,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내 눈으로부터 멀어져가듯 아이는 나로부터 멀어질 날만 남았으니까.
사랑하는 내 아들들에게
사랑한다고 더 자주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