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잘 잤는지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겨울잠 자는 곰처럼 자고 일어나 서둘러 배낭을 둘러멨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을 먹지 않고 밤 9시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밤 10시가 되는 생활이 계속되었기 때문일까. 주말이면 잠을 자는 것만으로 시간은 훅 흘렀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도 잔뜩 나이 먹어버린 철들지 않은 의식의 소유자라는 생각에 인생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이 실감 났다. 잔뜩 흐렸던 어제에 비해 오늘은 꽤 맑은 날, 아직 잠결이 남은 의식을 깨운 것은 계곡 따라 이어진 넓은 길에 하늘이 보이지 않게 우거진 숲이었다. 폐부를 맑게 하는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켰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렇게 청명한 날에 포근한 가을 햇살이 가득한 설악산 등산로에 형형색색의 단풍이 든 것처럼 사람들의 옷도 찬란했다. 옛날에 처음 왔을 때 비선대에 있었던 비선대 산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위치까지 가늠할 수 없었다.
설악산을 처음 찾은 것이 2013년 봄이었다. 마침, 알프스 몽블랑을 오르려다 산행 지식이 없어 까무러칠 뻔한 뒤로는 조그만 산이나 다녀야지 하곤 한국으로 들어와 벼르고 별러왔던 설악산 초행길에 그만 안개에 휩싸인 공룡능선을 타고 말았다. 그때 가보았던 금강굴 철계단 앞에도 안개가 가득했었다. 어쩌면주변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어쩌면 주변 풍경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한 감정은 온데간데없고오로지 시시한 설악산만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사실, 서너 번 다니면서 비선대가 왜 유명한지, 도대체 뭐가 볼 게 있다고 이런 곳에 산장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사람들이 경탄해마지 않는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고 단지 그 유명한 공룡능선을 지나고 나서 도대체 어디가 공룡능선 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설악산에서 볼만한 곳은 단지 백담사나 봉정암뿐이라는 냉소가 가득했었다. 그럼에도 산속에 고즈넉한 암자나 산장을 보면 그렇게 반가웠는데, 그것도 옛날 얘기였다.
마음대로 다녔던 산들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공단 직원들이 상주하면서 통제가 시작됐다. 그것은 등산객의 안전이나 자연보호보다는 사사건건 시비 걸고 갑질 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얼핏, TV 드라마에서 산에서 약초 캐는 사람들의 불법행위를 붙잡아 지적질하는 관리공단의 남녀 직원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약초꾼 두 명이 산에서 불법을 저지른 거였고 젊은 관리공단 여직원이 두 나이 많은 사람을 훈계하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 남자 직원이 여직원을 서포트하는 풍경이었는데 욕을 하며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렸다. 국공직원의 옳은 행위를 홍보하기 위해 약초꾼들을 몰상식한 악당으로 몰아가면서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갔던 공룡 능선과 금강굴 철 계단
설악산의 화려함에 비해, 지리산의 투박한 남성적인 매력은 산이라는 인식을 하고 처음 찾아 비박을 했던 때가 고딩 1년 때였다. 새벽안개가 가득한 아침에, 쳐 놓은 텐트 중간 지지대가 무너져 텐트를 이불 삼아 일어나니 주변 여자 등산객들이 꼬맹이들 귀엽다고 이것저것 챙겨주던 그때, 세석 평원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벙커가 빨치산이 사용하던 벙커였다고 친구랑 대판 싸우면서도 너무 많아 신기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 이후로 산에 대한 모든 기억이 지리산에만 한정되어 시간만 나면 혼자서 지리산에 올랐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되던 해, 88 올림픽 예선전을 대비해 지리산에 혼자 올라 3개월간 훈련을 하던 때는 산의 수려함과 웅장함, 넓고 깊은 골짜기들마다 들어선 몇 채의 집과 버려진 가옥, 산 정상마다 서린 옛날이야기보다 그저 내 꿈을 위한 운동장이 되어 앞마당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므로, 산은 오르거나 땀을 흘리는 대상이었다. 거침없이 광활한 한반도의 끝자락을 보게 해 주는 대상이기보다 운동을 해야 하는 대상, 어떤 상황에서도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대상이었다. 그렇게 남자 냄새 물씬한 지리산만 알았다. 진주에서 복싱 코치를 하다가도 훌쩍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오면 '또 지리산 갔다 왔어?' 하면서 모두들 내 부재에 대한 질책을 하면서도 지리산의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1년에 한두 번은 꼭 지리산만을 올랐다. 한국을 떠나기 전 1995년까지 다른 산을 올랐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프리카 파병을 다니면서 황금빛 사막,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태양 아래 서 있던 메마른 나무마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의식의 변화를 많이 겪었기 때문인지, 사물에 대한 미의 판단이 흐려진 것인지도 몰랐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거대한 해적 섬, '생 말로'를 처음 보았던 때의 충격이 커서, 우리나라엔 왜 그런 도시가 없는지, 아쉬움이 컸다면 천편일률적으로 꼭 같은 바닷가 마을을 이룬 횟집들이 미적 가치보다 상업적 가치에만 매몰된 것처럼, 커다란 간판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유럽과 큰 차이점이었다. 그러다 알프스 산맥에 올라 4월의 만년설을 보고 한국으로 들어왔으니 웬만한 풍경이 시시할 만도 했다. 그렇게 알프스 빙해의 그 웅장한 메아리와 비선대 계곡의 물소리는 명백하게 비교됐다.
코로나가 몰아닥친 지구,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이 창궐하여 국가의 통제 속에 맞이한 5일이라는 추석 연휴에 설악산으로 모인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이 진풍경이었다. 지난 통제의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대자연의 품 속이 제격일 것 같았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을 옆에 끼고 널찍하게 나 있는 숲을 따라 한동안 올라가자 와선대가 나타났다. 넉넉하게 걷는 사람들 사이로 제법 큰 계곡을 왼쪽에 끼고 비선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비선교 위에 선 사람들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거대한 암벽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암벽등반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프에 의지한 채 누군가는 정상에 거의 다다랗고 누군가는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암벽 아래를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기술을 부리고 있었다. 저렇게 힘을 쓰다간 금방 체력이 고갈될 것처럼 오랜 시간 암벽 아래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주 넋이 나가 마치 내가 거기 붙어 있는 것처럼 스스로도 아찔하게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소방대원들이 막 비선대 통제소로 향했다.
*** 비선대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을 양쪽으로 끼고 흐른 천불동 계곡이 비선대에서 왼쪽의 장군봉과 적벽을 만난다.
금강굴을 품은 왼쪽의 장군봉과 적벽, 2021년 추석에야 비선교에서 금강굴이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천불동 계곡 깊숙한 골짜기 큰형제 봉우리와 백두대간 주 능선에 가을이 내려앉았다.
분주한 걸음이 지나고 나면 저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와 함께 장비 소리가 마치 생명을 붙잡고 있기라도 한냥, 바위와 부딪히는 소리까지 청아하게 들리는 듯한 착각 속에 넋을 놓고 있다가 잠깐 눈길을 거두고 뒤의 계곡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이얼~"
알록달록 단풍이 물든 나무를 앞에 두고 아직 온전하게 단풍이 들지 않았어도 햇빛에서도 느끼는 완연한 가을의 냄새가 단풍 색깔과 함께 한껏 오감을 자극했다. 은은한 햇살 저 멀리 우뚝 솟은 큰형제 봉우리 뒤로 거대한 능선이 버티고 서 있는 풍경에 그동안 알아왔던 설악산이 아니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다리 위에서 양쪽을 번갈아 보다가 넓은 공간으로 이동해 배낭을 벗어놓고 장군과 적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신선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온화한 햇살과 함께 벽을 기대고 앉은 내게 히프노스가 남몰래 스며들었다.
비선대를 세 번 정도 왔던 것 같았다.
2013년 처음 왔을 때 이곳엔 산장이 있었다. 나는 산장에서 막걸리와 도토리묵을 시켜 먹고 비선대와 첫 합방을 했다. 숱한 산꾼들이 다녀갔을 이 산장의 사연이나 주변 풍경에는 관심 없이 첫 설악산행의 설렘과 막걸리에 헤롱헤롱 한 상태로 무척 추웠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첫날밤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마등령, 공룡능선 대청봉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해 당일에 전투적인 산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했던 옛날 기억이기도 했다. 그때의 산행은 그나마 체력에 자신있어 아주 전투적이었는데,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산군들의 수려함을 볼 수 없으니 열심히 걸었을 수 밖에! 안개와 함께 다녀갔다는 기억 밖에 없었다.
산에서 만나는 오래된 산장은 마음에 위안이 됐다. 고풍스러운 이미지와 하루 종일 말할 일이 별로 없는 힘든 등산길에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은 물론이거니와 산사람에게서는 무르익은 흙냄새가 나는 것 같아 마음의 위안이 되고 정겨웠다. 그리하여 사회에 찌든 마음을 해제하고 어떠한 긴장감도 없이 마음 편하게 만나 말할 수 있는 반가운 얼굴이자 벗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비선대에서 그런 부처의 얼굴을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고 옆의 계곡을 보고는 비선대가 그저 작은 계곡이 흐르는 곳으로만 생각했지 하늘을 우르르 장군봉과 적벽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곳이 우리나라 암벽등반 좀 한다는 사람들이 필수코스로 찾는 곳이란 것을, 그런 곳이 수없이 설악산 구석구석에 많다는 것을 최근까지 알지 못하다가 전문 산꾼이 알프스 몽블랑 아래 동료를 묻힌 이야기를 눈물로 말하는 동생을 만나고서야 알았다.
동생이 비선대를 말할 때는 애정이 잔뜩 묻어났다. UDT 출신에 잠수부와 전문 산악꾼으로 젊은 세월을 보냈던 동생이 말하는 암장(암벽등반)을 얘기할 때면, 앙칼지고 고약한 성격에도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달래듯, 마치 헤어진 연인 얘기를 하는 것처럼 애증을 품고 소중한 아이를 다루듯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듣는 사람마저도 암릉을 좋아하게 했다. 외인부대에서 배웠던 암벽 등반 기술은 까마득하게 잊어먹고 그렇게 암벽 등반 기술을 익혀보고자 산악회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보았고 협회에 등록도 했지만 정작 암벽을 탈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필요한 장비와 필수적인 매듭법만 안다면 얼마든지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그들과 합류해보고 싶었다. 그럼에도 시간도 여건도 마련되지 않았고 어느덧 훌쩍 나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그럼에도 꼭 합류해볼 작정이었다.
적벽 중간 즘, 암릉 지붕 아래를 통과하는 산악인의 거친 숨결이 온몸을 긴장시킨 근육과 함께 굵은 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적벽 아래, 큰 지붕 아래서 낑낑거리던 등반인이 그 지붕 암벽을 딛고 드디어 암릉에 올라서자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기 때문에 암벽에 기대에 졸고 있던 나도 잠에서 깨어났다. 정상에 이미 올라선 사람들과 아직도 오르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비선대는 화사한 가을 한가운데 평화로웠다. 시간을 보니 오후 세 시였다. 어디를 가기도 늦은 시간, 잠시 낮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흘러버린 시간이 야속하지 않았다. 등산로를 지키는 비선대 탐방소의 출입구는 굳게 잠겼고 어떻게 들어간다 해도 동네 산이 아니었으므로 목적지를 정하고 다녀올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 없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어제 토왕성 폭포로 가는 길에서 보았던 하얀 선으로 된 길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