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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Apr 06. 2019

또 하나의 가족

 삼성 중공업 2, 가족을 대하는 태도

삼성 중공업


 ***  Scafolding(비계, 족장, 발판)



 20년 넘게 현장에서 족장 일을 해온 반장이 내게 이동을 재촉했다.

작업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그의 물량팀 반장이라는 직위는 작업자들에게 전지전능했다. 작업 중에 타인과 이야기를 할 이유도 시간도 없이, 오로지 해야 하는 업무 만이 지배하는 그의 정신 세계는 나와 같은 사람은 현장의 룰을 깨는 이방인, 통제받아야 마땅한 신참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가 지배하는 아침 조회 시간은 오로지 업무와 관련된 얘기로만 출근과 퇴근을 지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회사의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이었으며 물량을 내지 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팀까지도 회사에서 쫓겨나야 하는 막중한 업무 스트레스를 가진 위치에 있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반장이라는 직위만 있을 뿐, 일당을 받는 일당쟁이로써 직장(직위)을 상사로 두고 팀장으로부터 월급을 받으면서도 하청 협력 업체 직원인 것처럼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았을 뿐, 법적인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회사의 앞잡이 중의 앞잡이였다. 필요하면 쓰고 끝나면 떠났다. 일할 땐 충성했고 떠나면 현장을 욕했다. 그에게는 즐겁게 일하는 행복한 현장이 아니라, 일을 많이 해서 회사와 팀장으로부터 인정받는 높은 일당을 받는 말단 책임자가 반장이라는 직책이었다. 전지전능한 그들의 권한은 신입들에겐 하늘 같은 존재였고 그들에게 맞추어진 작업 수준으로 신입들과 떠돌이 일꾼들에게 요구했다. 요구 조건에 맞추지 못하면 온갖 모욕과 왕따를 당하다 떠나고 서로서로 불신과 원한을 가슴에 쌓았다.


 반장은 오로지 맡은 바 업무를 위해서 충성할 뿐, 인간의 권리마저도 처리해야 할 업무였으므로, 나를 자신처럼 노동의 기계화, 인간의 노동화로 몰아넣었다. 그 부류는 작업뿐만 아니라, 인생마저도 통제를 하고 싶은 모양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직권을 남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 일하려면 그만두소”


“여기가 무슨 즐겁게 일하는 동네 놀이터인 줄 아쇼?”


 그의 언행은 직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순수하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의 미소는 순박하고 사람 좋은 모습 그대로,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업무 처리는 완벽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겐 전지전능했으므로 기가 막혔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랬다. 회사의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운영되고 있었으며 작업하는 시간 동안 모든 행동을 보고, 감시, 통제받았다.


 반장에게 업무 통제를 받고 있던 나는, 이 반장 외에도 다른 반장까지도 나보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는 작업장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일하는 모습이 자신들의 마음에 드느냐가 중요했다. 그래서 힘든 일을 할 때는 일부러 어려운 위치를 주어 힘들게 하는, 눈에 뻔히 보이는 갑질을 시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랬다. 족장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러했다. 이러한 노동 현장에서 살아보지 않았기에 아수라장을 보는 듯했다.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정신적인 충격이 오래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옥에서 살아남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삼성중공업 Egina 프로젝트 아침 조회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아프리카 파병을 다니면서도 이런 불신과 증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외인부대의 생활은 천국이었다. 어디에서도 이런 작업 강도와 통제를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 그들로부터의 고립을 선택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현장에서, 숨죽여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될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반장뿐만 아니라 같이 손발 맞춰 일하는 작업자가 하는 작업 지시는 그저 심부름 꾼이지 같이 작업하는 동료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조수가 되었고 그들은 조수로 대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는 작업자라도 만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불만을 드러내어 작업자를 바꾸어 달라는 요청이라도 하게 되면, 비밀도 없이, 금방 소문이 났다. 모두가 주의를 하기는커녕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왕따를 시켰다. 순응하느냐 욕지거리 날리고 나가느냐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었다. 그렇게 시간과 경력, 사람들과의 인연의 소중함은 온데간데없이 조선소를 돌아다니는 뜨내기들의 천국이 조선소이기도 했다.


한참 작업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욕설이 들려왔다. 


" 이 새끼야! 그렇게 일하려면 집에 ! 멍청한 새끼가 어디 와서 얼굴에 먹칠하고 있어!"


 가만 보니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산업전선에 뛰어든, 얼굴에 앳된 티가 잔뜩 묻어난 어린 친구에게 욕설을 하던 반장은,  명의 신입 중에서 유독 덩치가 크지만 둔해 보이는  명에게 욕을 집중하고 있었다. 끈질기게 뒤를 따라다니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친구로 보이는 다른  명은 모른  외면했고 다른 작업자들도 과의례인 것처럼 무신경했다. 


  *** 불신의 시대


 조선소에는 한 번 안전 교육을 실시할 때마다 400여 명이 한정된 인원이라고들 했다. 일주일에 네 번 정도 안전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인원들이 천여 명, 한 번에 들어온 인원들이 각 업무 파트 별로 현장에 투입되면 한 달 후엔 남는 인원이 10%가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버티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안전 관리도 협력업체였다.

 

 협력업체 관계자들의 제1의 덕목은 충성과 헌신이었다. 좋은 기술력으로 빠른 업무처리가 이뤄지면 내려오는 도급비가 깎였다. 이득을 얻기 위해선 노동자들의 등골을 뽑아야 하는 시스템이 협력업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고 그것이 OECD 국가에 등록된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나는 오전, 오후 통틀어 휴식 시간이 20분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그것도 감시와 통제로 일찍 내려가는 걸 막았고 불이익을 주었다. 점심시간에 이동하는 거리가 걸어서 10분이 넘어도 융통성 있는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고 협력업체 사장 이하, 직원들이 감시했다. 심지어 삼성 직원들이 나와서 막았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좀 일찍 나와 신선한 곳에 앉아있을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반장이나 직장이 감시하며 따라와 잔소리를 했다.


“아재 같은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욕 얻어먹잖아요!”


그렇게 감시자의 권리를 행사했다. 그랬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노동자가 노예 취급에 개돼지 취급받는 거지!”


 나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온몸은 증오와 혐오로 들끓었다.

불신의 시대에 서로서로 고자질해서 이웃이 죽고 미운 이웃을 죽인 시대가 있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자질해서 소중한 이웃이 죽었고 그 죽음의 그림자는 나와 내 가족에게 왔던 시대가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그랬다. 그 광란의 시대에 서로서로 죽이고 죽었던 불신의 시대는, 절대 왕정을 끝내고 종교의 시대도 끝내면서 공화정으로 내 달리던 프랑스의 암흑의 시대로 ‘똘레랑스’와 ‘연대의식’을 낳았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암흑의 시대였다.


 한국에도 어깨에 완장 찬 시대에 죽창으로 사람을 죽였던 암울한 시대가 있었다. 경제성장을 최대의 가치로 내세워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뤄가던 시대에, 한국이 세계 최대의 조선소 보유국이 되었고 조선소에는 상부상조의 전통과 행복하게 일할 권리를 잃어버린 일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체계회 되어 강요당하는 현장에서 나는, 몸서리치는 분노와 증오의 꼭대기에서 조금씩 노예화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로 누가 뭐라고 하든 내 할 일을 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싶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음이 맞는 작업자와 프랑스 친구들은 내가 지향하는 즐거운 작업을 이해했다.


 현장에서 매일 만나는 세바스티앙과 제임스는 내가 유일하게 즐겁게 인사할 수 있는 친구였다. 휴식 시간이나 점심시간 후에 잠깐 만나 나누는 얘기에 나는 수다쟁이가 되어 내가 느낀 현장에서의 부조리와 해결책에 대해 재미 삼아 말해 주었다. 나는 그들의 공정에 비해 빠르게 진행되는 작업 상황에 셸이나 테크닙이 따라가지 못할지언정, 현장에서의 불만 사항이 없을 거라는 것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오후 5시면 업무 종료하고 칼 퇴근에 동네 바에서 술 마시고 한국 여자를 꼬시는 즐거움에 비하면, 저녁 10까지 근무하면서 만일의 일까지 대비하는 삼성의 노동력이 불만사항을 만들리 없었다. 그러나,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작업자들이 이런 통제와 감시를 받지 않고 즐겁게 일하면서도 내 일처럼 애착을 갖고 일한다면, 재 작업이나 수정 작업을 줄이고 프로젝트 비용마저 줄이면서 넉넉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내 얘기에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나 문제점은 계약서상 삼성이 해야 할 일이었고 삼성이 그럴 리가 없기 때문에 내 플랜이 뜬구름 잡는 얘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적임자로 그 일을 하면 어때?”


 세바스티앙이 말했다.

나는 알제리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알제리에 꽂혀 있던 나는 지옥 같은 조선소가, 상부상조의 전통과 품앗이의 연대가 사라진 현장에서 명확하게 무얼 해야 할지는 계획이 서 있지 않았다. 단지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가진 한국 노동자들을 존중과 배려로써 잘 대해주면 그 결과가 지금보다는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다. 더욱이 너무 자주 바뀌는 작업자들의 고용 안정화, 복지에 대해 조금 더 신경 써준다면 더 좋은 결과를 창출해 낼 것 같았다.

 

 그러나 테크닙도 셸도, 다른 선주사들도 거대 조선소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동조하면서도 노동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를 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이 아니었다. 또한 중공업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체계는 변화가 불가능해 보였다.


 또한 내가 셸이나 테크닙의 옷을 입는다고 해서 삼성의 거대한 조직력을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단지 생각만 그렇게 할 뿐, 이들의 제안을 만족시켜 줄 방안은 없었다. 완전하지 않고 즐거웠던 미완성의 내 플랜은 휴식 시간에 뜻하지 않게 만난 프랑코폰들과의 한국 얘기로 즐거웠지만 삼성을 온몸으로 증오만 했지, 리더 해 나갈 방법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잠깐 와 있는 곳이긴 하지만 나는 한국의 이런 착취 시스템이 가증스럽고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그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조직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세바스티앙과 제임스의 배려는 고마웠다.




***  또 하나의 가족


아침 조회. 8시 작업 시작인데 항상 7시 30분 미팅

 업무를 마치면 노동자들이 우글거리는 중공업 후문, 미니스톱 앞에 모여 맥주나 마시며 노동의 이야기로 저녁을 보내는 사람들의 낙은 술과 업무 얘기뿐이었다. 숙소는 너무 작은데 사람들은 넘쳐나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어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싶어 부끄러웠지만 모두 다 노동자들이었으므로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노동자들의 숙소가 밀집된 지역은 이 후문에 몰려 있었다. 건물은 계속 생겨나 뒷 산을 조금씩 잠식해갔고 가파른 경사로 계속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이전에 있던 숙소들은 인간적인 멋이라곤 없는, 어쩌면 고단한 노동자의 삭막한 마음을 닮은 듯 황량했다.


 새롭게 현장에 투입된 사람들은 3개월 간격으로 건강 진단을 받아야 했다. 비용이 7만 원가량이었다. 진단서에 문제가 발생하면 의사 소견서를 받아 적은 돈이라도 지출을 감당해야 했다. 사용하는 침구류는 개인이 모두 구입해야 했다. 숙소엔 식탁 테이블이나 의자가 갖추어진 곳이 거의 없었다. 원하면 모두 사야 했다. 숙소 비용은 급여에서 제했다.


 팀장이나 직·반장들은 서로서로 어려운 상황들을 헤쳐 나온 동지들이었다. 거실을 침실로 사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거실을 침실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 ‘또라이’라 몰아붙였다. 그런 고생도 없이 인간대접받으면서 일하는 얼빠진 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조직의 규율과 팀장의 돈벌이에 방해가 되는 자는 지위 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또라이’였다. 자신들이 고개 숙여야 할 대상은 오로지 물주, 그런데 오로지, 술 한잔 사주면서 베풀어주는 호의를 고맙게 생각해야지 감히 불만을 품는 배은망덕한 놈들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한 마인드로 살아남은 조선소의 반장이라는 직책이었다. 업무에 있어서는 실수와 실패,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애써 열심히 일을 다녀도 노동 강도와 수고에 비해 돈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웬일인지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더욱 주머니가 얇아지고 씀씀이가 없는데도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술을 아끼고 주말도 없이 일해도 그랬다. 드디어 드는 생각이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모으고 가족들을 부양할까 하는 생각에 경이로운 마음마저 일었다. 일요일도 없이 일했다. 밥 값이라도 아끼고 주말에 한 시간씩 줄여 일찍 퇴근하는 것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내가 미치지 않으면 미친놈 취급받는 조선소 생활은 그렇게 ‘나도 기계화된 노예다’라면서 스스로 위안 삼고 서로서로 위안 삼으로 눈물을 머금은 일당을 벌었다.


 노동자들이 밀집된 원룸 타운은 말 그대로 인정머리 없이 숙소로만 조성된 타운이었다. 일요일이면 갈 곳 없고 적막하고 삭막한 동네, 오히려 휴식이 어색한 동네에 들어선 편의점이 폭리를 취하고 인정머리 없게 지어진 원룸들의 구성이 정나미 떨어졌다. 깔끔해 보이는 건축물에 비해 언제든지 들어왔다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이불도, 베개도, 침대도 없이 머물기 위해 지어진 집이 아닌 풍찬노숙을 피하기 위해 지어진 정나미 떨어지는 구조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들은 맨땅에 잘 수 없어 흐름 한 집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그래도 그들은 큰돈을 벌어갔다. 모두 젊고 멋진 친구들이었다. 그들을 위한 기도 공간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한국의 시스템에 동화된 그들이 고기는 먹어도 술은 마시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인간성을 상실한 사회를 보고 가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었다. 작업 중엔 그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과 비난을 일삼는 한국 사람들도 많았지만 항상,


"그렇게 일하려면 집에 가!"


 그럴 권리도 권한도 없으면서, 하는 짓이 만행에 가까웠다.

 

 오로지 돈을 위해 사람을 대하고 사람이 돈으로 보이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자본의 더러운 얼굴이 거기 있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바라거나 사람 사는 정을 바랄 수 없는 삭막한 인간 사막이 조선소 주변으로 상가를 이루었다.


 월 8백만 원을 거뜬히 넘긴다는 팀장이 맥주를 사면서 자신이 가진 족장의 철학에 대해 강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라, 엔지니어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 그들의 수고에 대해서는 감탄했다. 그리고 팀장이 말하는 해외 프로젝트에 나가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해봤다는 그의 안타까운 시도는 선주사 물량이기 때문에 사외 협력업체, 즉, 에이전시를 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 같았다. 월 8백을 버는 대한민국 1%이지만 자기 위에 군림하는 길을 모르는 1%이면서 언제든지 그들 앞에 고개 숙이며 무릎 꿇을 수 있는 자존심 센 빨대 대장의 일장 연설은 그 자신의 성공을 위해 보여주었던 위대한 업적을 자랑하면서 끝났다.


 물론, 나도 그 당시에는 다양한 업체의 존재와 업무를 몰랐고 오로지 알제리에만 꽂혀 있었기 때문에, 내게 왔던 숱한 기회를 놓쳐버린 순간을 의식하지 못한 체 보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일부러 고생을 초래하기도 했다. 모든 정보는 현장에 있었으나 알지 못할 뿐, 안다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것을 저염식, 혹은 채식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일주일 내내 거의 바뀌지 않는 식단이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돈을 아낄 수 있는지, 풀로만 구성된 식단들



 머지않아 나는 삼성중공업의 인간의 노동 기계화 시스템에 동화되었다. 끊임없이 간섭하는 인간의 노예화에 항복 선언을 했다. 일당 10만 원에 거실이라도 재워주며 숙식제공이 되다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변동이 심했고 그 어느 팀도 같은 팀원과 오랫동안 일하지 못했다.


 팀장 편에 선 관리자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약해 빠졌다고 손가락질했다. 정 줘봤자 소용없다고도 했다. 험악한 일에, 열악한 환경에, 쇳가루 먼지를 마셔가며 개 죽 같은 밥을 먹고 욕 얻어먹어가며 쇳가루와 분진가루 냄새로 범벅이 된 작업복을 세탁기에 돌리고, 먼지들로 침침해진 눈을 씻어내려 눈물 어린 샤워를 하면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노동 현장이라고 설득하려 들었다.

 

 누구도 오라고 요구하지 않았지만 갈 때는 ‘가라’고 말했다.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도 주종 관계로 엮였듯이 현장에서의 주종 관계는 마치 '함무라비 법전'처럼 위대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가고 사람들이 왔고 그렇게 사람대접 못 받으면서 갈 곳 잃은 사람들이 다시 와서 그 생활에 익숙해졌다. 마치, 누가 먼저 쓰러지나 내기를 하던 ‘하성 기업’ 족장 공들은 다행히 아무도 쓰러지는 사람 없이 여름을 끝낼 수 있었지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테크닙 사람들도 보다 많이 알게 되어 저녁이 되면 바에서 맥주 몇 잔에 프렌치 식 밤 문화를 즐겼다. 내게 족장은 즐거운 일이었으나 잠깐 운동삼아 할 거란 생각이었고 조만간 알제리로 갈 것이란 확신은 평온을 가져다주었지만, 아무것도 확정된 것 없는 암울한 미래가 동시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차피 부양할 가족 없이 혼자이고 무얼 할지 미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도 애매한 나이, 40 대 중반이었다. 그렇다고 희망을 잃고 포기하기엔 나를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삭막하고 정 없는 이 곳 거제도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족장 일은 힘들지 않았으나 감시와 통제가 싫었다. 시간과 행동을 감시와 통제하는 것이었지 안전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안전이 작업자의 안전을 위해 감시와 통제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수준은 하루에 쳐 나가야 하는 보고서에 올릴 성과에 관련된 정도였기에 실질적인 안전은 개 풀 뜯어먹는 소리였다. 현장 직, 반장들이 안전의 옷을 입고, 작업을 통제하는 것 외에 누가 안전인지도 모를 정도로 안전이 무엇을 하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선주사와 테크닙에 일하는 안전감독관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던 마음도 사라져 갔고 삼성중공업 주변의 삭막한 환경은 더더욱 싫었다. 어차피 일하지 않는 날엔 즐길 여가 거리도 없었고 산을 다녀야겠다는 여유도 없이 조선소처럼 나 자신도 삭막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프칸이나, 아프리카 콩고 내전에 참여해서 무의식 속에 전투를 벌이던 것보다도 더 참혹한 현장이었기 때문에, 현장에서의 일은 현장의 일대로 정이 떨어져서 할 의욕이 점점 상실해 갈 무렵, 테크닙 친구들이 제시하는 감독관이나 코디네이터 자리는 내 관심 밖이었고 할 줄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거절하기만 했다. 급여가 실 수령 천만 원이 넘어가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이곳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쇳가루와 분진가루로 가득 찬 곳을 흡연장으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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