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실 Jan 21. 2022

지금이 가장 그리울지도 모릅니다

엄마를 위한 그림책 '개미 요정의 선물'

개미 요정의 선물, 신선미 그림책
엄마와 할머니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운 시간 속으로


엄마는 할머니와 함께 오래된 사진첩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딸이 어렸을 때 바빠서 많이 안아 주지 못한 걸 아쉬워합니다. 아이는 그런 할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개미 요정들을 부릅니다. 개미 요정들은 할머니와 엄마를 위해 특별한 옷을 만듭니다. 그리운 때로 돌아갈 수 있는 투명 장옷입니다. 엄마와 할머니는 투명 장옷을 입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가 서로를 꼭 안아줍니다.



 여섯 살 첫째 아이가 혼자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신나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아이 곁에 누군가 있다. 개미요정이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개미요정’, 나에게도 개미요정이 있었을까?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작은 강아지 인형이 닳도록 안고 다닌 아이, 때 묻은 인형을 엄마가 몰래 버린 날 온 집을 헤매며 서럽게 운 아이, 돌멩이 하나로도 이야기를 꾸며내던 아이, 장난감마다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던 아이, 그때 내 세상에도 개미요정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함께 슬픔을 이겨내고 즐거움을 키우던 친구들, 그리운 나의 개미요정들!  



 20개월 된 둘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방긋 웃는다. 나는 얼굴 근육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웃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엔 소리 내어 웃는다. 아이는 웃음 부자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도 따라 웃게 된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 어른과는 달리, 아이들은 반달 모양 웃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이들의 눈에는 세상 곳곳에 즐거움이 묻어있다. 그 즐거움을 찾을 때마다 웃음보를 터뜨리니, '아이고 귀여워.'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도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 이름에 '실'자가 들어가는 아이가 방실방실 웃고 다녀서 별명도 방실이, 실실이였다. 눈물도 많아서 기뻐도 울고, 웃다가도 울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리 내어 웃을 일이 별로 없다. 눈물까지 흘리며 배가 아프도록 웃었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아이가 사운드북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동요 '곰 세 마리'가 흘러나온다. 아이는 박자를 쪼개며 엉덩이를 흔든다. 나는 웃음이 터졌다. 아이들은 선물이다. 순수한 웃음을 잃은 어른들을 다시 웃게 만들기 위해 찾아온 선물. '세상엔 웃을 일이 너무 많아.' 개미요정이 나에게 속삭이듯, 아이의 웃음이 나를 일깨운다.



 엄마의 옛날 사진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앳된 모습으로 어린 나를 안고 있는 우리 엄마.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어렸을 때다. 보드랍고 뽀얀 피부가 참 곱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다는 것을.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의 딸이었던 것처럼, 엄마도 처음부터 나의 엄마인 줄 알았다. 아기가 소녀로 자라고, 그 소녀가 여자가 되어, 이제 막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없었다.  


 엄마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문을 외치듯 '엄마'를 부르면 어디선가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엄마는 내게 세상 사는 법을 알려주는 좋은 스승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엄마는 베테랑처럼 보였지만 이제 막 엄마가 된 새내기였다. 자신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 아이, 자기만 믿고 삶을 시작한 아이를 보며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 고비를 넘기면 보이는 또 다른 난관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느낀 묵직한 감정들을 우리 엄마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엄마는 긴 세월을 견뎌 내고 할머니가 되었다. 손주들과 함께 있으면 엄마도 아이가 된다. 아이처럼 밝게 웃는 엄마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깊게 파인 주름을 보며 엄마가 묵묵히 걸어온 길을 생각한다.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림을 하며, 아이 둘을 키운 우리 엄마. 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나에게 속삭였다. ‘엄마도 잘 해왔으니까, 나도 잘할 수 있어.’



 먼 훗날 나에게도 그리운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투명장옷이 생긴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엄마’를 찾는 소리에 귀가 따가워도,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아이를 꼭 안을 수 있는 지금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엄마한테 가장 상처받은 순간이 언제인지 말해줄 수 있니?"

 투명장옷을 입기 전에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날로 돌아가서 어른답지 못한 행동으로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의 상처가 바로 아물 수 있도록, 아이가 덧난 상처를 품고 살아가지 않도록,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싶다. 


 첫째 아이가 작은 방에서 나온다. 아이의 주머니가 볼록하다. 개미 요정일까? 아이도 나도 활짝 웃는다. 지금이 가장 그리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처를 잊으라고 한다. 틀렸다. 상처는 기억하라고 흉터를 남긴다. 다시는 그런 일들을 반복하지 말라는 표식이다. 또 누군가 그 상처를 보고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종이에 살짝 베어 보일 듯 말 듯한 상처에도 쓰라림은 있다. 상처 주는 말도 자주 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내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한다. 어떤 말이 우리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면, 한번 직접적으로 물어봐도 된다.

-김선호, '엄마의 감정이 말이 되지 않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