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가 묵었던 신비의 섬
또 한 번의 퇴사를 했다. 회사를 그만두면 이직하기 전에 늘 여행을 다녀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회사에서 나오게 된 이후, 나는 다시 한번 엄마와 동생과 급 여행을 계획해 떠났다.
여행지는 5박 6일 동안 있기 좋은 곳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난 좀 쉬고 싶었기 때문에, 북적북적이는 곳이 아니라 조용하고 여유 있는 곳에 가서 천천히 생각 정리도 하고, 지쳐있을 나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었다. 그러다 엄마가 갑자기 떠올린 곳이 야쿠시마다. (우리 엄마는 혼자서도 여행을 잘하고,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멋쟁이다. 다양한 여행 프로와 책으로 얻은 지식은 물론, 지구의 이곳저곳에 대해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다.)
야쿠시마는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곳이었다. 사진 몇 개만 찾아봐도 온통 초록초록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완전한 팬으로서, 자연과 지구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때의 나에게 가장 완벽한 여행지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본 영화 두 편.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와 '캡틴 판타스틱'
원령공주는 퇴사 후 저렴하게 중고로 구입한 프로젝터로 내 방에서 본 첫 영화였고, 캡틴 판타스틱은 여행 가기 하루 전날 관람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두 영화 모두 '숲'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또 한 번의 중요한 선택을 내린 나에게 나침반이 되어 주었고, 나는 다음 여행지를 숲으로 정하길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쿠시마는 야쿠시마의 신에게 불린 사람만이 가는 장소
내가 야쿠시마에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내 일본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야쿠시마는 야쿠시마 신의 부름을 받아 가는 곳이라고, 나에게 "너도 신의 부름을 받았니?"라고 물어보았다. 휴양지보다는 숲에 가고 싶었던 것도, 엄마가 갑자기 이 곳을 떠올린 것도, 내가 본 영화가 숲을 중요한 배경으로 한 것도 일종의 싸인이었을까. 숲과 바위, 산이 나에게 좋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친구 덕분에 난 신의 부름을 받은 건가? 하는 즐거운 상상과 함께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이킹을 즐기는 엄마는 몇 시간 동안 숲을 걷고 산을 오른 후 "천천히 하는 고생도 즐겁지?"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세상과는 조금 이질적인 자연의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내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 결합된 휴식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도착한 날과 돌아오기 하루 전날 이틀은 가고시마에서 지내고, 나머지 4일은 야쿠시마에서 있었다.
야쿠시마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고작 4일이었지만, 최소한 2주는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숲에서는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다. 산으로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신호가 없어진다. 그렇기에 잠시라도 해방될 수 있다.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동떨어져,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숲을 거닐며, 오로지 내가 보고 있는 광경과 찬란한 공기를 숨 쉬고 땅을 밟는 느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야쿠시마의 순간순간을 최대한 많이 흡수하고 돌아왔다.
하이킹은 야쿠스기 랜드와,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시라타니 숲을 돌았다. 다양하게 시간별 하이킹 코스가 정해져 있어, 기호에 따라 트레일을 골라 걸을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도 등록된 야쿠시마는 수천년 된 나무와 이끼로 뒤덮여있는데, 길을 걸으며 보이는 광경과, 각 숲의 느낌은 미묘하게 차이가 느껴진다.
야쿠시마의 숲에는 신성한 기운 같은 게 있다. 현장에 직접 가보면 느껴지는 게 다르다. 모든 식물이 다 살아있는 거지만, 이 곳에서는 '나무들이 진짜 살아있다'는게 온몸으로 전해져 실감이 난다.
숲을 걸으며 계속 흥얼거린 노래가 있다. 바로, 라이프앤타임의 숲.
"숲을 걷는다. 어루만지는 빛. 감싸는 향기. 강한 마음, 변하는 기분, 흐르는 피, 움직이는 몸. 오래된 사유, 새로운 생각."
아름다운 자연의 품 안에서 숲 내음을 맡고 걸으며 충전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사유와 새로운 생각'들이 머릿속에 마구 스쳐갔다.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들었지만, 이 가사가 이런 뜻이었다니.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야쿠시마의 자연에 반해, 1년간 야쿠시마의 민박집에서 묵었다고 한다. 원령공주뿐만이 아니라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장면들도 야쿠시마의 영향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센'의 이름을 야쿠시마에 있는 폭포 이름에서 따오기도 했다.
사진으로 봐도 알겠지만, 야쿠시마의 숲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장소도 해가 뜨거나 구름이 져서 빛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랐다. 내 경험상으로는 해가 중천에 떠있던 대낮보다, 아침에 살짝 구름이 껴있을 때, 해가 내는 빛이 조금씩 숲에 비치기 시작할 때가 가장 신비로웠다.
같은 길을 돌아가는데도, 해가 모든 걸 환하게 밝혔던 때에는 봤던 장면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아침에 본 것과는 사뭇 다르게, 조금은 평범하게 느껴졌다. 마치 야쿠시마의 숲이 신비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어떤 문을 열어줬다가 이제는 닫아버린 느낌이었다.
이 산 정상에 있는 바위가, 원령공주가 늑대를 타고 산을 내려다보던 바로 그 바위다. 꽤 가파른 코스를 올라가야 했는데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이 길을 올라갔다 내려와서 먹은 벤또 맛은 그야말로 꿀맛!
야쿠시마의 나무들은 잘 썩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수천 년 전에 쓰러진 나무도, 기둥이 잘려버린 나무도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설명을 읽으며 나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이런 나무들은 온통 초록색 이끼로 뒤덮이고, 그 위에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쩌다 예외로 이런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광경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쓰러진 나무와 기둥이 잘린 나무는 죽은 걸까 아직 살아있는 걸까. 이전의 목숨은 죽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끼로 뒤덮이고 새로운 나무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는 모습은 마치 새 생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였다.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이렇게 예측하지 못했던 것에서 감동을 받는 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입구로 돌아가는 길에는 계획을 바꿔, 내가 갑자기 가보고 싶어 했던 경로로 방향을 틀었다.
이 길에서 다시 우리를 감탄하게 한 광경들이 나타났고 (문이 다시 열린 느낌이었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또 다른 감동과 마주했다. 3,000살이 넘은 나무를 만났을 때다.
야쿠시마의 오래된 나무들. 표정을 짓고 있는 나무도 있고, 힘줄과 근육이 우락부락한 나무도 있고. 산 꼭대기에 있어 나무를 삥 돌아 가까이서 마주하게 되었던 3,000살 된 나무는 놀랍게도 색이 하얀색이었다.
마치 산신령과 같은 모습의 이 백색 삼나무 앞에서 나는 꽤 오래 서 있었다.
'3,000살이 넘은 이 나무에게 이제 고작 30살인 나는 얼마나 작게 보일까. 나의 시간의 흐름과 이 나무의 시간의 흐름은 다르지 않을까? 3,000년 전이라면 기원전인데. 이 나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초고속으로 돌려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이 나무 곁을 지나갔을까. 그 사이에 세상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이 나무도 한때는 작은 새싹이었겠지?'
나는 숨을 크게 깊이 들이마셨다.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나무가 만들어낸 산소를 들이마시며, 좋은 기운을 함께 흡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야쿠시마는 숲 말고도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들이 있었다. 작은 섬이기 때문에 바다가 있는 건 물론, 일본 100대 폭포도 있고, 바다 온천이라는 신기한 장소도 있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따뜻한 온천물이 있는... 썰물일 때 온천을 즐길 수 있고, 밀물일 때는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밀물일 때 도착해 온천이 바다와 섞여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온천이 있는 부분은 물이 따뜻하다!
야쿠시마의 다양한 모습들
이동 중 원숭이 조심!
자동차로 산길을 달릴 때, 원숭이 무리와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인지 야쿠시마에서는 아무도 속도를 내 운전하지 않는다. 언제 원숭이가, 사슴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야쿠시마의 원숭이는 야쿠자루, 사슴은 야쿠시카라고 부르는데 둘 다 덩치가 작고 엄청나게 귀여웠다. 오래된 숲을 신성하게 여기고, 너무나 잘 보존하고 있는 일본인들과, 원숭이와 사슴 때문에라도 천천히 운전하며 다니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부러운 감정도 들었다. 우리나라도 오래된 것들과 자연을 조금 더 아끼고 보호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은 감동은 역시 사람인 것 같다. 잠깐 먼저 구경하고 있으라며 굳이 야쿠시마산 귤을 사와 우리에게 들이밀던 택시 아저씨도, 숲 중간에 사진 찍어주며 인사 나눴던 모녀를 하이킹을 끝낸 자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너무 해맑게 웃으며 인사해주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야쿠시마의 자연과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을 사는데 진짜로 중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다시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야쿠시마. 조금은 지쳐있던 나를 듬뿍 충전시켜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