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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융 Aug 12. 2017

직업이 여러 개인 시대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가 여러 개가 된다는 것

언젠가부터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밖으로 나와 더 실감하게 된 사실이 있다. 이 '발견'을 한 이후로 이런 현상과 사람들이 내게 더 자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있듯이, 한 개인이 하는 일은 다양해지고 표현하는 수식어는 여러 개인 시대가 오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신작인 <잠>을 보면,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에 엄청난 무게중심을 두고 자각몽을 꾸는 세노이 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족은 꿈속에서 거대한 구름 형태로 인류의 모든 영혼과 지혜가 모여있는 곳에 접속해 아이디어와 지혜를 얻는다. 정말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 곳에서는 인류 전체의 지식을 빌어 꽤 쉽게 해답을 찾고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본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진짜로 이게 가능하다면, 이건 반칙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나도 이런 곳에 접속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고립된 숲에서 나와 인터넷을 익힌 부족 한 명은 이 '거대한 클라우드'를 인터넷상의 클라우드와 비교한다. 


집단 지성이 모여있는 거대한 클라우드. 세노이 부족이 자각몽을 통해 꿈속에서나 접속하던 클라우드와 비슷한 곳에 우리는 아무 때나 단순한 손가락질 몇 번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의 등장과 발전, 스마트폰의 보급화는 무언가를 배우고 누군가와 소통하는 진입장벽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이는 개개인이 크리에이터인 동시에 서비스 제공자이자 소비자, 미디어인 상황을 만들고 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가게를 내는 대신 인터넷의 곳곳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기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신의 서비스나 물건을 팔았다. 그러다가 오픈마켓과 플랫폼이 등장했다.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아도 누구나 셀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진입장벽은 더더욱 낮아졌다. 시간이 흐르며 이 플랫폼들은 더욱 세분화되어 '내 상품/서비스를 좋아할 만한 사람들'을 미리 모을 수 있거나 이미 모여져 있는 곳이 되었다. 아니면 오히려 확장되어 판매 가능성의 파이를 엄청나게 키워주는 곳이 되었다.


플랫폼이 세분화되고 종류가 다양해지며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이 되는 사례가 급증했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어떤 것. 그래서 조금은 더 잘 아는 그 무언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혹은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 또한 무수해졌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예를 들어볼까.


"누구나 가게 주인이 될 수 있다"

- 물건을 손쉽게 올리고 팔 수 있는 수많은 오픈마켓은 다 나열할 수 조차 없다

- 아이디어가 빛나는 상품은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과 구매할 사람들을 미리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다

- 무언가를 만들기 좋아하던 사람들은 Etsy에 상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저 좋아서 향초를 만들던 사람들, 솜 인형을 만들던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고객을 만났다


"좋아하는 일로 선생님이 될 수 있다"

- 설령 '엄청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한 발이라도 앞서 있다면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이드해줄 수 있다. 내가 겪은 과정을 나누는 게 곧 서비스가 되었다 

- 그림, 춤, 여행, 서핑, 사진, 손글씨, 영상제작, 빵 굽기, 요리 등등등... 그 무엇이든 가르쳐주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생겼다 (심지어 퇴사의 요령과 후기까지도 나누는 시대다)

- 지금 생각나는 서비스만 해도 이 정도 - 프립, 숨고, 탈잉, 트레바리, 인생학교, 퇴사 학교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 0에서 시작해 +로 가기까지,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과정이 있다면 0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여행이든, 어떤 일이든.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강연이나 토론도 가능하게 만들지만 (위의 선생님 예시처럼), 그 과정이 담긴 컨텐츠(글, 영상, 사진 등)를 원하는 사람들도 찾을 수 있게 된다. 

-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은 셀 수 없이 많다. 브런치만 예를 들어도, 1년에 두 번씩 출판사와 함께 출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30개 이상의 글이 모이면 작가가 손수 출판할 수 있는 브런치 POD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이 발행되는 위클리 매거진도 생겼다.

- 꼭 온라인 플랫폼을 거치지 않더라도 책이 내고 싶다면 독립출판물로 내는 것도 가능하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시대다. 말 그대로 하고 싶다면 진짜 그냥 하면 된다. 


"누구나 가이드가 될 수 있다" 

- 내가 사는 동네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이 역시도 누군가에겐 기꺼이 지갑을 열만 한 '가치'가 되었다

- 마이리얼트립을 통해 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은 한국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 에어비앤비 트립은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란 컨셉에 맞춰 현지인들의 업이나 취미에 따른 색다른 '트립'을 제공한다. 나도 작년부터 몇 달간 트립 호스트로 참여하며 '서울의 인디씬'이란 주제로 게스트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뮤직바에 가고, 홍대 공연을 보고 뒤풀이를 했다.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 인디 공연을 보고, 같이 뒤풀이하고 노는 게 일이 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일종의 '투어 가이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던 일이다.


"누구나 미디어가 될 수 있다"

- 1인 크리에이터나 인플루언서는 1인 매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 당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소셜 채널 역시 하나의 미디어다 (유튜브, 페북, 블로그 등) 기업도 많지만 일반인들이 만들어서 시작된 게 더 많다

- 원한다면 팟캐스트를 통해 라디오 디제이가 될 수도 있다


"누구나 마케터가 될 수 있다"

- 텐핑, 애드픽처럼 나의 소셜 채널을 활용해 1인 마케터가 될 수 있는 곳도 많다

- 수만 명 상당의 페북 페이지 또는 소셜 채널이 있고, 광고를 돌릴 줄 안다면, 그리고 좀 부지런하다면... 수익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손쉬운 타겟팅이 가능하고 가성비가 좋은 소셜 채널을 통해 유저에게 닿으려는 광고주들이 줄 서 있을 것이다. (모바일 광고 업계에 발을 들인 후 처음 이런 사례들을 접했을 때 소셜 매체를 운영하는 1인 마케터들이 한 달간 버는 금액을 보며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아는 사람들만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모르는 신세계였다. 부업으로 시작했다가 부업의 수익이 본업을 넘어서 본업을 그만둔 사람도 여럿 봤다. 그래도 든 생각은. 적성에 맞아야 하겠더라.)


"누구나 큐레이터가 될 수 있다"

- 정보의 홍수 속에 원하는 정보를 쉽고 뾰족하게 찾을 수 있게 해주는 '큐레이션'과 '검색의 기술'은 능력이자 경쟁력이 되었다. 

- 정보가 곧 경쟁력이란 건 요즘엔 하루에도 몇 번씩 실감한다. 여행을 다닐 때도, 일을 할 때도, 일상생활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무엇이든 어떤 걸 알고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조합하는지가 차이를 만든다.

- 브랜드 큐레이션은 29CM, 패션 큐레이션은 스타일쉐어, 정보의 큐레이션은 퍼블리, 인테리어 큐레이션은 오늘의 집이 생각난다

- 큐레이션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셀러, 크리에이터, 마케터, 미디어, 선생님, 작가, 가이드 등)


단숨에 생각난 정도만 해도 이렇게나 많다. 



There's a hack for that

There's a hack for that 이란 말이 있다. 무엇을 고민 중이든 시간과 비용을 절약해주는 팁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다양한 서비스의 세분화는 '끼리끼리 모임'과 '구체적인 도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도전해볼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플랫폼들은 누구든 쉽게 배우고 이끌어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누구는 배움/도움/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지갑을 열 것이고, 누구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게 가능해진 환경이다 보니, 셀러, 크리에이터, 작가, 매체, 마케터 등의 이런 카테고리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많다. 어찌 보면 개개인이나 소규모 조직일지라도 점점 플랫폼화 되는 시대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한 개인이 좋아하는 게 어떤 것이고,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이야기가 차별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썼던 글: https://brunch.co.kr/@yoonash/77 ) 이건 브랜드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브랜딩을 잘하는 기업들을 떠올려보면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스타일인듯한, 남들과는 다른 성격이 보인다(i.e. 배민, 29CM)  


조금 더 이어서 얘기하자면, 이런 이유로 어디에든 자기만의 그 어떤 것을 담은 자신의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추후에라도 뜻밖의 기회로 발전될 수도 있다. 



꿈꾸지 말라는 말

종종 '더 이상 청춘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지 말라!'는 식의 내용이 회자되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다. '훌륭한 사람이 돼라!'거나 '성공한 삶을 살아라!'는 말처럼 은근히 나의 자유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형태의 성공을 압박한다거나 강요하는 말에 지쳐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공감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 말을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꿈'이란 단어가 너무 부담스럽다면 그냥 결과를 생각하기 이전에 진짜 그냥 좋아해서, 관심이 가서, 해보고 싶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봤으면 좋겠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없어도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고, 해볼 수 있는 게 많아진 시대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험해보지도 않는 건 너무 아깝다. 그리고... 좋아하는 게 있으면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고, 그러다 보면 진짜 신기하게도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방향으로 자꾸만 재미난 일들이 생긴다. 


그래도 꿈을 꾸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그거야 개개인의 자유고 뭐, 말리진 않겠지만.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일을 하면서도 실패할 수 있다. 실패의 리스크가 똑같이 존재하는 이상, 내가 스스로 재미있어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게 훨씬 더 낫다. 



여러 개의 수식어를 가진다는 것

주변에도 찾아보면 꽤 있을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서핑, 스케이트보드, 클라이밍, 타투, 요가 등 다양한 취미에 빠져있다가, 시간이 쌓일수록 취미가 능력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부업으로 발전했다가 본업이 된 경우를. '어떤 일 하세요?'라고 물어보면 잠시 망설이다가 '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가끔 이런 것도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프리랜서와 원격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는 회사도 그런 사람들을 점점 더 많이 채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풀타임이든 파트타임이든. 회사를 다니면서 투잡을 하거나 부업으로 다른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가장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회사를 다니면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운영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모두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 '한 명의 사람이 좋아하고, 관심 있고, 잘 하는 것'이란 하나의 공통된 연장선 안에서 다양한 일들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고, 좋아하는 일에 관심을 쏟는 만큼 그 역시 하나의 능력이 되어 그 사람을 표현하는 수식어 또한 늘어날 것이다. (이 문장을 끝마침과 동시에 생각난 사람은 손미나 작가님이다. 그녀는 여행작가이자, 허핑턴포스트의 편집장이자 인생학교 서울의 교장선생님이자 손미나앤컴퍼니의 대표다.)


사실 여러 개의 수식어를 가진다는 건 그렇게 새로운 일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일을 하는 어느 회사나 소속의 누구일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의 아내/남편이자 엄마/아빠, 딸/아들이다. 몇 년째 하고 있는 취미가 있다면 곧 아마추어 화가이자 사진가, 작가, 플로리스트, 요가 강사일 수도 있다. '다면적이고 진화하는 자아상'을 갖고 있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보다 잘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스스로를 한정 짓지 않고 더 유연하게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게 해준다. [1]


최근 읽었던 엘렌 랭어의 책 <마음 챙김>에는 '기업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면 똑같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라고 나온다. 좋았던 문단이라 통째로 소개한다.


기업들은 자신의 사업을 특정 시장에서의 활동으로 정의해 놓고는 그로 인해 스스로 만든 범주의 틀에 갇히기도 한다. 1975년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근시안적 마케팅'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에서 시어도어 레빗은 이렇게 썼다.

- 철도회사들이 성장을 멈춘 것은 승객과 화물이 운송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다. 수요는 증가했다. 철도회사들이 현재 어려움에 처한 이유는 다른 업체들(자동차, 트럭, 비행기, 전화)이 그 수요를 충족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철도회사들 자신이 그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업체들이 고객을 빼가도록 놔두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운송업계가 아니라 철도업계에 속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참고한 책:
[1] 엘렌 랭어 <마음 챙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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