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스코프를 좁혀나가기
들으면서 보면 좋을 플레이리스트:
https://youtu.be/idJvKyToSTA?si=xYaI1UDty3IfzK-g
'네가 입는 옷 스타일이 좋아'
'너는 취향이 뚜렷하잖아'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하다. '내가?', '어떤 스타일?'
옷 잘 입는 그거... 매거진에서만 볼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옷장은 생각보다 옷이 없고, 옷은 비슷한 스타일이 많다. 분야마다 가지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나 혹은 두 개. 대체제를 찾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는다. 숙고하고 꼭 맞는 느낌이 들어서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다 맞닿은 생각.
'아, 비슷하고 꾸준하게 옷을 입는 것. 내가 좋아하는 향이 무엇인지 알고 그 향을 찾아 꼭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 특정한 브랜드를 좋아하는 이유가 뚜렷한 것. 그리고 그걸 남들에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취향이구나, 그게 뚜렷하다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대체 그 취향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을 의미한다.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구나 이해하게 된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을까.
취향에 대한 목록을 소개하기에 앞서, 나의 취향의 역사에 대해 짧게 읊고자 한다.
(TMI가 싫은 사람들은 스크롤을 휘리릭 내려보자)
때는 바야흐로 중학교 2학년. 지방에서 살던 나는 시험기간이 끝나고 나면 엄마에게 5천 원, 만원을 받아
시내의 지하상가로 놀러 갔다. 무서운 화장을 한 언니들을 요리저리 피해 파인애플맛 슬러쉬를 들고선 이런저런 옷들을 눈에 담아본다. 초코송이 머리를 한 친구들과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오천 원짜리 티셔츠 한 벌을 사서 검은색 비닐봉지에 덜렁거리면서 돌아다닌다. 그러다 담배냄새가 나는 노래방에 들어가 2시간 내내 다비치-체리필터-백지영-린의 노래를 열창하다 허기진 배를 이끌고 성심당에 들어가 두 바퀴 정도 돌며 시식빵으로 주린배를 채우고 나면, 다시 머나먼 집으로 향하는 여정이 배고프지도, 외롭지도 않았던 것 같다.
조금 더 머리가 크니 인터넷 쇼핑몰에 눈이 뜨였다. 인터넷얼짱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런저런 옷과 신발을 장바구니에 담아놓곤 엄마에게 간곡히 주문을 요청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시간이 꽤 지나고 나니 그 제품들 중 대다수는 그 당시 유행했던 명품이나 유명 브랜드의 카피상품이었음을 깨닫는다. 질이 좋지 않아 색은 빨리 퇴색되고, 프린팅 된 셔츠들은 뒤집어 빨아야 한다는 기본 상식도 부족했을 때였으니 어느새 얼룩말 줄무늬처럼 갈라지고 떼지는 프린팅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던 시절들이 머릿속을 타고 흘러간다.
고등학교는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 그리 많은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 나이 때부터 생활복들이 도입되어서, 손을 번쩍 들면 브래지어가 보이느라 안에 흰 나시를 받쳐있는 크롭 한 교복보다는 어두는 감색에 통기성이 우수했던, 편안한 생활복과 체육복 반바지를 유니폼처럼 6일 내내 입고 다니는데 큰 불만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왔다. 화장도 처음, 눈이 안 좋아 두꺼운 뿔테 안경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여성스러운 패션은 내게도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서울 친구들은 다 그런가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예쁜 옷을 입고 다녔다. 따라가려니 다리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나도 내게 맞지 않는 패션이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입고 다녔는지. 옷은 빵꾸가 나면 기워입고, 찢어지면 새로 사는 거라는 절약정신 속에 자라 13살 차이 나는 큰언니가 입었던 옷들을 물려받은 내게는 따라가기 벅찬 것들이었을지 모르겠다. 돈이 넉넉지 않아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 기에 충분한 기회가 없었다. 하나 사서 부지런히 입은 옷이 새내기가 되어 술을 먹고, 야식을 먹느라 쪄버린 몸에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가는 길. 몸에 간신히 들어가는 하나 남은 애착 청바지의 허벅지 부분이 뜯어졌다. 아무도 내 허벅지가 뜯어진 것에 신경 쓰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자의식 과잉이어서 너무나도 부끄럽고 슬픈 마음으로 허겁지겁 청바지사이로 삐져나온 허벅지를 가리고 집에 돌아갔다. 주머니에 남은 돈으로는 이번주 먹고살 거리를 생각해야 해서, 물려받은 옷가지들과 몇 없던 옷들 사이에서 내가 입을 옷이 없음을 깨닫고 그저 슬퍼진 하루들이었다.
---- 개인사 끝 ----
어느 순간이 되니, 존재도 없는 허상의 어떠한 존재. 모두에게 사랑받고, 사랑받을만한 행색과 외모를 가진 누군가를 따라잡기 위해 애쓰고 있던 내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절박해서였는지, 아니면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마음이 앞서서였는지 유행에서는 조금 멀어지는 선택을 했다. 시기 좋게도 마침 물건을 정리하는 시즌이 되었다. '미니멀라이프'를 접한 것이다. 굴레처럼 받아 든 15년이 훌쩍 넘은 빛바랜 언니의 옷가지를 정리하고, 털이 풀풀 날리는 정체 모를 옷가지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그때부터였나 무엇 인갈 고민하고 찾아가기엔 빠듯하고, 채워져 있던 삶에 '여백'이 생기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때마침 근로장학으로 돈도 벌어가기 시작하고, 비워진 옷가지들에 내 몸에 맞는, 내가 원하는 기준들에 맞춰 옷을 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내 몸은 여성복에서는 사이즈를 찾기 어려워서 유니섹스 브랜드나 남성브랜드에서 S사이즈를 즐겨 구매하기 시작했다.
남성 브랜드를 구매하다 보니 새롭게 알게 된 부분들은. 부자재들이 튼튼하고, 질 좋은 것들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었고, 디자인적 부분보다는 제품의 마감과 질에 더 중점을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어떠한 뚜렷한 기준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비워진 만큼 우악스럽게 채워 넣기도 하다, 한 두 해가 지나도록 좋아하는 브랜드의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신발이기도, 외투이기도, 가방이기도, 때로는 안경테이기도 했다. 쇼핑의 실패를 경험하며, '무엇이 별로였는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샀던 것인지' 등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것이 취향의 기준점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나는 시간이 흐르며 조금은 살이 빠지고, 안경을 필수가 아닌 옵션을 낄 수 있게 되고, 내게 잘 어울리는 머리스타일을 찾았다. 콜렉터처럼 한 브랜드의 옷을 탐닉하기도 했다가, 변해가는 유행에 중고거래로 되팔아버리는 것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이 정도면 더 이상 빼지도, 추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라는 생각에 머물렀다.
사람마다 정의하는 취향의 개념은 제각각이겠으나
나에게 있어 취향은 '꼭 맞음'이다. 무언갈 더하거나 빼어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주어진 것을 최대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확신이 더해지는 고요한 상태.
나의 스코프(범위)가 드디어 좁아졌다.
어떤 뚜렷한 목적성 없이 허기를 채우고자 정처 없이 찾아 헤매던 탐닉적 쇼핑에서,
허상의 이상을 상정하고 도달하기 위해 부단했던 과정에서,
더, 더, 더를 그만 외쳐도 될 만큼.
모든 것에 뚜렷한 취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만
나름 안정화가 된 나의 취향 목록들이 있는 것 같다.
옷을 고르는 데 있어서는 아래의 기준이 적용된다.
- 관리법이 너무 까다롭지 않은 것. 실용성이 있고, 불편하지 않은 옷, 원단은 기본티/바지/부자재/니트/아우터에 따라 해당 분야에서 좋다는 부자재나 원단 함량이 괜찮은 것
- 눈에 띄는 옷은 구매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옷들과의 매칭이 어려울수록 그 옷과 맞는 다른 옷을 사고자 하게 된다. 무난한 베이식아이템이 결국 가장 오래간다.
- 기본티는 질이 좋지만 오염에 취약하기에 세탁이 용이해야 하며, 베이식한 핏으로 구매해야 하며, 부담 없이 교체가 가능해야 한다. (고가의 티셔츠보다는 2만 원 내외의 티셔츠)
- 아우터나 니트류는 관리를 잘한다면 오랜 기간 입을 수 있으며, 눈에 잘 띈다. 저렴한 제품보다는 중고가의 제품을 구입한다. 원가가 부담스럽다면 중고로 구매한다.
- 물건에는 '1 in 1 out '규칙을 적용한다.
- 색감은 모노톤, 브라운, 아이보리 계열까지 허용 / 여름옷은 푸른 계열의 옷까지 추가 가능
-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과감히 팔거나 나눔을 한다.
쓰임 받지 못한 채 한구석에 뉘어진 물건이 제일 불쌍하다.
- 옷을 구매했다면 관리에 힘쓰자. '탈취제/보풀제거기/스팀다리미/먼지제거용 롤러'
그리고 손빨래가 꼭 필요한, 오염과 변형에 취약한 것들은 직접 관리하기. 신발의 밑굽은 제때 관리해 주기. 가능하다면 집 주면의 수선집과 구두수선집을 알아놓기.
이외에도 적어보자면,
향수는 시트러스계열을 좋아한다.
(아쿠아디파르마 아란치아 디 카프리, 딥티크 오에도, 르라보 베르가못, 딥티크 오데썽 등)
비누향, 플로럴계열, 우디, 스파이시한 향들은 코끝을 찡하게 만들거나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가방은 활용도가 높아야 한다.
백팩 하나만 주장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대학원생이 되고, 어른스럽게 보여야 할 자리들이 생기니
핸드백과 아이패드에 책 한 권 들어갈법한 숄더백 혹은 숄더백.
하루정도 훌쩍 여행을 떠날 때 짐을 넣을 수 있는 백팩 정도는 필요하다.
신발은 여자치고 큰 발 크기(255), 새끼발톱이 커서 앞코가 너무 좁은 신발은 넷째 발가락에 새끼발톱이 찡겨 발이 너무 아프다. 반평발이어서 피로도가 높은 신발은 신기 어렵다. 높은 굽보다는 3-5cm 혹은 단화에 볼이 너무 좁지 않은 신발을 신는데, 구두는 주문제작이 가능한 성수동발 수제화 브랜드를 적극 활용한다.
액세서리는 기본적으로 작고 조그만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작은 피어싱을 주로 착용하고 다닌다. 근래에는 여기저기 여덟 군데 정도 뚫어놓은 피어싱이 부쩍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본 두 곳을 제외하고는 막아놓을까 생각 중이다.
커피는 핵과류의 맛을 좋아한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 아이스커피를 좋아한다.
대흥동의 소저너를 즐겨간다. 소저너에서 열흘에서 삼주는 먹을 수 있는 원두를 늘 200g씩 사간다.
사장님께서 적절한 분쇄도를 맞춰 갈아주신다. 집에서 가장 피곤한 시간 단순한 소저너의 커피파우치를 열면 신선한 커피내음이 밀려오는데 거기서부터 행복이 찾아온다.
티는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즐기며, 여름이면 내내 생각이 나는 코코아이스티를 찾아
약수동의 파오리를 간다. (이래놓고 안 간 지 오래돼서 또 그립다)
운동은 달리기를 좋아한다. 이유는? 돈이 안 들고, 가장 생기가 돈다.
지금은 못 달리고 있어서 울적한 근황이다.
어서 초봄이 왔으면 좋겠다.
음악은 죠지, 소수빈(싱어게인 3 49호 그 사람), 구원찬. 샘킴, 카 더가든의 노래를 좋아하고,
최유리, 다린, 김수영(싱어게인 3 60호 그 사람), 윤지영, 권진아의 노래를 좋아한다.
장소는 경의선 숲길과 안산(서대문구에 위치한 산), 합정동 아래 한강길, 후암동
... 적다 보니 시키지도 않은 백문백답이 되어버릴 것 같다.
아무쪼록 이후의 포스팅들은 내가 오랜 기간 꾸준히 관심 갖던 브랜드에 대한 것들로 시작할 것 같다.
더 나아간다면 장소에 대한 리뷰가 될 수도, 음악에 대한 평론이 될 수도.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자의식이 높은 사람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난 심리학 전공자로 실제로 자의식이 높은 편이다(?).
내가 보는 내 모습이 어떨지, 취향도 결국 그 관점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는지...
그래도 취향 한 꼭지 풀어내며 다시금 내가 애정하는 제품과 공간과 시간, 마음을 되돌아보는 목적으로
이 매거진의 작은 시작을 알리고자 한다. (그리고 다들 각자 취향 좀 뽐내주세요, 나 역시도 궁금)
*주의- 옷 잘 입는다는 건 아님. 취향이 뚜렷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