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체, 체

우리는 삼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by 햇살나무 여운


첫 번째 체, 사전적 의미로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 데 쓰는 기구를 가리킨다. 흔히 필터나 멤브레인, 프레임이나이라고 부르는 그것.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우리는 모두 제각각 다르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우리는 모두 고유한 체를 지녔다. 성글고 거칠게 숭숭 거르는지 아주 촘촘하고 빽빽하게 곱게 거르는지. 핑크빛도 있고 회색빛도 있다. 구멍 나고 찌그러지거나 찢어진 체도 있다. 마음이나 심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나와 닮은 체를 만나면 편안하고 반갑다. 나와 다른 체를 만나면 재미있고 호기심이 인다.


(사진출처 : 네이버)


두 번째 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것. 사전적 의미로는 글, 글씨, 그림 따위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방식이나 격식이다. 첫 번째 체에 오랜 시간이 더해져 나타나고 형성되고 어느 정도 일정한 모양으로 굳어진다. 첫 번째 체로 받아들인 것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한자로 ' 체(體)'를 쓴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말을 하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든 몸이 있어야 표현할 수 있기는 하다. 스타일이나 개성이라고 부르며 우리들은 자신만의 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첫 번째 체에다 시간과 경험을 켜켜이 쌓아가는 노력과 정성을 건너뛰고서는 가질 수 없다. 그 경험에는 좌절과 실패도 포함이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으면서 그렇게 되기를, 그것을 갖기를 바라기만 하고 탐하기만 하면 욕심이 된다. 이 두 번째 체는 <해리포터>의 마법사의 돌 같기도 하다. 내 주머니 안에 있으나 내가 가지고 있다고 내 입으로 직접 말할 수 없고, 오직 이것을 보고 듣고 읽고 느낀 사람들에 의해서만 "당신이 그것을 지니고 있다"라고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영원히 가질 수는 없을지도. 자신만의 그 돌을 찾아 나서는 여정만이 있을 뿐. 김훈이나 최진영의 체를 동경하고 좋아할 수는 있으나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세 번째 체,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시늉이나 척!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많이 하고 있는 그것. 물론 알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방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서로가 허용하고 인정하고 이해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는 그걸 사회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자존심과 체면을 어느 정도 지켜주는 것이 에티켓 아닌가. 조금 더 어려운 용어를 빌려오면, 세상 속에 섞여 살아가는 데에는 몇 개의 페르소나(가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너무 헐벗은 민낯은 예의와 배려에 어긋나 서로를 불편하게 하기도 하니까. 이 센서가 잘 작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TPO를 가리지 않고 늘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오래 체를 하다 보니 그게 스스로 진짜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믿어버리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잘난 사람은 우러르고 인정하고 따르고 싶지만, 계속 잘난 체하는 사람은 안쓰러울 만큼 꼴 보기 싫은 것처럼.


주말 아침부터 쎄쎄쎄도 아닌 체체체를 이렇게 뻔하게 구구절절 쓰고 있느냐고. 두 번째 체에서 한계에 다다르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면 슬그머니 세 번째 체를 불러오고 싶으니까. 뭔가를 쓰려면 세 번째 체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인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멋이고 맛인지, 아니면 멋있는 체하는 것인지!- 해보려고 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어떡하지? 글러 먹었다. - 정말로 뭐가 있는지, 뭐가 있는 척하는 것인지! 그것이 문학적 은유이고 서정성인지, 아니면 허세인지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있으니까. 그 어떤 체라도 우리는 단 번에 들통나고 말테니까.


삼체가 일치하는 경지에 다다르면 그것이 곧 진정성이 되겠지요. (삼위일체 아니고, 삼체일치......)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저 지금 뭐라도 '쓰는 체'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체험 삶의 현장으로! 누에는 좋겠다. 뽕잎만 먹고도 비단실을 뽑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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