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해맑음과 귀여움을 기본 능력으로 장착하고 있던 언니였는데, 러블리한 여름 모자를 쓰고 작은 키에 빵빵하게 부푼 배를 앞세워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사랑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임신이 아직 신기하고 낯선 세계인 나는, 점심을 먹으며 언니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언니는 다행히 입덧은 없었고, 요즘은 항상 장기가 눌려 있는 더부룩한 느낌이 있으며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거운 걸 들고 있는 듯하고, 허리가 쉽게 아프고, 몸이 쉽게 피곤해진다는 것도. 나는 아마 거의 완전한 모습의 작은 인간을 품고 있을 언니에게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것 봐. 너-어무 귀엽지 않아, 우리 조카?”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언니는, 500일 정도 되는 조카가 있었다. ‘응애.’라는 의성어가 어쩜 그리 정확한지에 대해 한참을 얘기하던 그 언니는 조카의 얼굴을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해놓을 정도로 팔불출 사랑꾼이었다. 사진 속 아기는 제멋대로 뻗친 데다가 훅 불면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아기 특유의 솜털 머리카락을 하곤 빵끗 웃고 있었다. 어딜 만져도 다 보드라울 것 같았다.
그렇게 곧 태어날,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에 관한 이야기가 무성하게 피어올랐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속에서 달콤함과 위험함의 냄새를 동시에 맡았다.
아이에 대한 설렘과 행복감만으로 가득 차 있는 임산부는 아마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출산과 육아의 행복만큼, 공포와 두려움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빛과 어둠은 언제나 공존하니까.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거나 쉽게 알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임신과 출산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사건은 우리가 버스에 올라탔을 때 벌어졌다.
오후 다섯 시, 버스 안엔 사람이 꽤 많았다. 막달인 언니가 힘겹게 몸을 움직여 버스에 탔는데, 왠걸, 모든 임산부 배려석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언니가 바로 앞에 섰는데도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일 없이 계속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과연 저 거대한 임산부의 배가 그들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버스가 덜컹이자, 언니는 버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혹시 임신 중이세요?"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나의 불편한 기색을 읽었는지, 언니는 내게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괜찮아, 네 정거장만 가면 되는데 뭐."하고 말했다. 시내의 도로는 꽉 막혀서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끊임없이 신호에 걸렸다. 저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언니가 허리를 움켜쥐고 서 있어야 한다니, 배 밑에서부터 화가 솟구쳤다.
나는 배려석에 앉은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그들은 결코 나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언니가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자리 양보를 부탁하겠다고 귓속말을 해도, 언니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순간, 비켜달라는 말을 못 하는 언니에 대한 답답함도 느껴졌다. 왜 말려, 나 말 좀 하게 해줘!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감정 소모'라는 것은 체력 소모만큼이나 힘들다. 게다가 애초에 자리가 비워져 있었으면 '비켜달라'라고 말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앉아 있는 사람에게 비켜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언니는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고, 네 정거장의 거리 때문에 비켜달라고 말한 이후 혹시나 겪을 수도 있는 더 큰 불편한 상황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나보다 언니가 이런 상황을 더 많이 겪어보지 않았을까. 내가 임산부가 아니고 사람마다 성격도 생각도 다 다른데, 언니에 대해서 쉽게 판단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피곤한 언니가 머릿속에서 굳이 그 편함과 불편함의 계산기를 두드리게 한 원인은 배려석에 떡 하니 앉아 있는 데다가 주위도 살피지 않는 저 사람이 제공한 것이고, 저 사람만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언니는 맨 앞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내리자, 대신 그곳에 앉았다.
'이렇다니까.'
그때 나의 머릿속을 채운 말은 이것이었다. 그래, 이렇다니까. 이럴 줄 알았지만 정말 이럴 줄이야. 언니는 말했다.
"가끔 지하철에 타면, 다른 자리가 비어 있는데끝자리가 편하다는 이유로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종종 봤어."
임산부 배려석은 언제나 비워두는 것이 맞다. 임신 초기에는 사실 더 조심해야 하는데, 그땐 육안으로 임신 여부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래서 언니는 임신 초기 때는 임산부 배지를 꼭 달고 다녔다고 한다. 몸이 힘들어서 혹은 자리가 붐벼서 어쩔 수 없이앉게 되었다면 스마트폰만 쳐다보거나 속 편하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살피며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임산부가 비켜달라고 말하기 전에 일어나서 기분 좋게 양보해야 한다.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가 앉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이 지극하고도 평범한 상식에 왜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을까? 임산부 배려석이 존재하는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임산부에게 배려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나. 그런 와중에 심지어 배려는 배려일 뿐, 강제할 수 없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배려는 필수다. 적어도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만큼은, 배려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한다. 그게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왜 수많은 교통약자들 중에서 임산부에게만 배려가 선택인지 아닌지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는 건지.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떨어지는 출산율을 걱정하고 생명을 찬양하며 탄생을 축복하면서도 여성의 건강과 안전에는, 여성의 삶과 생명에는 그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때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이 글을 나와 수많은 너에게 바친다. 우리 사회에서 나와, 나의 언니가, 나의 여동생이, 나의 누나가, 나의 엄마가, 나의 친구가, 나와 그리고 너와 연결된 모든 여성들이 건강하게 임신 과정을 거치고,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하고,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기를 바라며. 조금의 변화라도 일어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