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초롱 Dec 03. 2023

아낌없이 받는 삶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빗방울과 제일 먼저 인사하는 풀잎처럼 비 마중을 맨발로 나갈 수 있다. 소똥과 흙으로 만든 벽과 골함석 지붕 덕분에 냄새와 소리로 비가 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찬 계절이 없는 나라에서 날씨 변화는 개구쟁이처럼 다가와서, 작은 비가 와도 좋고 큰 비가 와도 좋다. 집을 한 바퀴 둘러싼 마당에는 원래 이 땅에 나던 것들과 한국에서 온 야채들이 고루 자랐다. 오른쪽 마당에는 아보카도 나무와 바나나 나무가 높이 솟았고, 왼편에는 토마토, 파, 배추, 상추, 부추같이 키가 낮은 것들이 자리했다. 식물은 땅뿐 아니라 어디서든 활발하다. 나무의 가지가 무성하게 늘어져 담장의 절반을 덮었고, 나머지 절반은 담쟁이 식물과의 이비도도치가 덮었다. 조롱박처럼 생긴 이비도도치는 오이와 무의 중간 맛이 난다. 아쉽게도 배추와 부추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씨가 말랐는데 그 빈자리를 심은 적 없는 하얀 백합과 다른 꽃들이 냉큼 메웠다. 마당에는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나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흙 밑에서 치열한 힘겨루기가 벌어진다. 땅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또 다른 투쟁이 기다린다. 작은 새들과 곤충들에게 몸의 일부, 혹은 전부를 내줘야 한다. 새들은 매일 아침, 마당의 일부를 조금씩 베어 물고 날아갔다. 나도 마당에서 파를 잘라 된장찌개를 끓이고 이비도도치를 따서 무생채를 무치며 포식자의 영광을 누렸다. 한국에서 귀농이나 텃밭에 들여야 하는 정성과 비교하니, 이곳에서는 정말 한 것 없이 많은 것을 받는 것 같다. 


 문지기처럼 서있는 아보카도 나무는 겨울이 없는 덕분인지 1년 내내 과실을 맺었다. 한쪽에 익은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자면 다른 쪽에서 새로운 열매가 맺혔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시장에서 잘 익은 아보카도를 150원에 살 수 있지만 꼭 나무에 있는 아보카도가 익기를 기다렸다. 나무는 내가 키운 것도, 키울 것도 없이 약한 잎을 떨궈내며 쑥쑥 자랐고 아보카도가 익을 때면 내게 수확의 기쁨까지 선사했다. 멜랑제*에서 아보카도를 처음 먹고 난 뒤부터 2년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먹었다. 아무 조미료 없이 먹으면 특유의 향이 입안에 부드럽게 맴돌고, 약간의 소금과 후추를 뿌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요리가 된다. 바나나와 함께 갈면 과일주스, 간장과 고추냉이를 곁들이면 회가 된다. 과카몰리나 다양한 종류의 샐러드에도 위화감 없이 섞이는 천의 얼굴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의 아보카도다. 매일 조금씩 자라던 아보카도 나무가 어느새 집을 삼킬 듯 거대해졌다. 뿌리가 집 밑으로 깊숙이 뻗쳐 벽에 균열이 생겼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줄기는 옆으로 넓게 퍼져 옆집 하늘을 가렸고, 위쪽의 열매는 긴 막대로도 딸 수 없었다. 열매의 개수는 많아졌으나 영양분이 골고루 가지 않아 그 크기가 현저히 작아졌다. 제때 수확하지 못한 곪은 열매들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었고, 나무는 자기 살을 파먹으며 무섭게 자라났다. 그렇게 나무는 우리 집과 옆집을 넘어 골목 전체를 지배할 기세로 뻗어나갔다. 결국 귀국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매일 얼굴을 맞대고 손길을 주고받던 나무가 하루아침에 무참히 베이고 말았다. 새벽부터 창가에서 두런두런 인기척이 느껴져 나가니 집주인이 밝게 웃고 있었다. 녹슨 도끼를 든 인부 한 명과 함께였다. 놀란 내 표정을 보고 집주인이 나무뿌리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벽에 길게 간 금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집주인의 어깻짓이 동네 하나를 밀어버린 후 별 수 없다는 정치인 같았다. 집을 잠시 빌렸을 뿐 곧 떠나야 하는 내게 나무를 지킬 만한 힘은 없었다. 인상을 쓴 채 나무가 쓰러지는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르완다의 다른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나무를 베는 일도 느리게 진행되었다. 거대한 나무는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쓰러질 기미를 보였다. 녹슬고 무딘 손도끼에 나무가 반응하자 주인과 인부가 기뻐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집주인은 일이 생각보다 더디게 흐르자 도끼보다 더 녹슬어 보이는 톱을 가진 인부 한 명을 데려왔다. 낡은 도끼와 녹슨 톱이 호흡을 주고받으니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베는 소리와 찍는 소리, 바람과 잎사귀들의 소리가 어우러져 장송곡이 된다. 낡고 잔인한 도구들보다 나무가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은 더 살았을 텐데 괜히 괘씸하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애도의 기운이 담겼다. 바람은 여러 군데의 헛도끼질이 할퀸 상처를 보듬고, 작은 충격마다 몸서리치며 떨어지는 잎사귀들을 흙바닥으로 안전히 실어 날랐다. 나무가 죽어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은 바람과 나뿐인 것 같다. 멀찍이 지켜보는 사이에 결국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를 몰아내고 영광을 차지했다. 집주인과 인부들, 구경꾼들이 오래전부터 동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왔던 나무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여러 사람들이 나무를 둘러메어 사라진 후 바닥에는 머리를 흔들며 떨어진 잎사귀와 멍든 아보카도 몇 알만 남았다. 이제 바람마저 어디론가 떠나버린 듯하다. 어설프게 잘린 밑동과 빈터를 밝히는 하늘이 휑하다. 


*멜랑제(Melange): 르완다식 뷔페 



아보카도 나무, 2020, 박초롱
우리 집, 2019, 박초롱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 유창한 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