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초롱 Dec 17. 2023

산의 영역

 우리 동네에서는 어디를 가든 시야에 산이 들어온다. 평균 해발 3,900미터의 산*들이 평야 위에 우뚝 솟아 있기 때문이다. 콩고와 우간다 국경까지 넘나드는 이 산들은 고릴라 트래킹과 등산 코스로도 유명하다. 수호신처럼 영험하게 대지를 감싼 산들을 보며 오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르완다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등산은 관광하러 온 친구들을 배웅하면서 시작되었다. 산에 오르기 전날, 관광센터와 가까운 우리 집에서 모인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다 잠들었다. 꼭두새벽에 배웅을 하는데 친구들이 대뜸, 지금 갈 곳은 다섯 개의 산 중 가장 쉬운 코스이며, 거주자 할인이 적용돼서 매우 저렴하고 정오에 끝나니 어제보다 멋진 오후를 보낼 수 있을 거라며 꼬드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여러 문제들이 겹쳐 동네에서 유명한 고릴라 트래킹조차 못 해본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술이 덜 깬 상태의 흐린 판단력이 나를 떠밀었다. 출발시각에 임박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아무 옷이나 걸치고 집을 나섰다. 시내에 있는 관광센터까지 걸어가니 사파리 트럭 몇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부부와 젊은 부부, 혼자 온 사람들과 미국 평화봉사단원(Peace Corps) 청년들이 등산과 여행이 일상인 듯 편안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현지인 가이드와 짐을 들어주 는 포터, 야생 동물로부터 관광객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총을 든 군인들과 함께 트럭에 타고 산으로 향했다.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던 험한 길이 끝나자 하얀 꽃으로 가득한 벌판이 펼쳐졌다. 새벽의 찬 공기가 진하게 배인 풀과 흙, 유칼립투스 향을 맡으니 머리가 맑아졌다. 르완다 최대 수입원인 관광지답게 이른 아침부터 따뜻한 커피와 이차이**등이 오두막과 천막에 즐비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자유롭게 자란 들꽃들이 부딪히며 살랑이는 소리와 고지대의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 굳은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이차이. 여기서 만족하고 발길을 돌렸어야 했다. 한국에서 타던 산과는 출발점부터 경사가 달랐다. 산을 오르자마자 높이 자란 수풀이 해를 가려 어둑한 정글이 되었다. 산속의 시간은 산 밑의 시간과 다르게 흘렀다. 오랜 시간 서로 부대끼며 공간을 빚어낸 나무들은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뿌리부터 줄기, 가지까지 수많은 식물들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우듬지가 덩굴과 어깨동무를 한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서 내리쏟아지는 미지의 시선과 발을 밑으로 잡아끄는 축축한 땅이 사람들의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갑자기 뒤틀린 나무 덤불 사이에서 분뇨 냄새가 들이쳤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검회색의 커다란 진흙더미가 몇 덩이씩 쌓여 있었 다. 버팔로***의 배설물이었다. 버팔로는 잡목이 우거진 습한 밀림을 좋아하고 그 속에 거칠게 자란 풀을 주식으로 삼는다. 우기에만 수컷들이 합류하는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번식을 위해 무리 지어 높은 곳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귀가 예민한 녀석들은 일찌감치 영역을 표시한 후 자리를 떠났다. 어둡고 깊은 숲 안쪽에서 버팔로의 검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는 듯했다. 가파른 비탈 뒤쪽을 돌아보니 발밑이 아득해졌다. 안개가 코밑에서 아른거리며 숨을 막고, 빛이 들지 않는 검은 숲이 눈을 어둡게 만들었다. 간헐적으로 산을 적시는 빗줄기에 흙이 젖어 발이 푹푹 빠지기 시작했다. 소금 사막을 건너는 홍학 새끼의 다리처럼 밑창에 달라붙는 진흙의 무게가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졌다. 위에서 불어내려오는 찬 바람이 이마를 자꾸 뒤로 밀고,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어깨를 짓눌렀다. 오를수록 길이 좁아지며 2미터가 넘는 톱니 모양의 풀들이 얼굴과 온몸을 할퀴며 달려들었다. 차라리 여기서 쓰러져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 응급상황이면 헬리콥터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구잡이로 스쳤다. 정상에 오르는 걸 포기하고 진흙 턱에 앉아 기다리겠다고 가이드에게 부탁했지만, 내려가는 경로가 다르고 버팔로나 고릴라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산 아래에서는 살랑대던 풀소리가 파리처럼 웅웅 거리고, 예쁘게 재잘대던 새소리는 야단스럽게만 들렸다. 억지로 오르자니 환청까지 들리는 듯했다. 팔다리는 걸음마다 바람과 중력에 못 이겨 이리저리 나풀거렸다. 앞뒤로 꽉 막힌 수풀림이 시작도, 끝도 없다고 귓가에 속삭였다. 느닷없이 미국 청년들의 노랫소리가 바람에 실려 내려왔다. 모두가 지쳤을 때 울려 퍼지는 떼창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비몽사몽으로 올라가면서도 아는 팝송이 나오면 속으로 흥얼거렸고 아직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이때부터는 필름이 끊긴 듯 단편적인 장면만 떠오른다. 포터가 직각 이상의 경사가 나올 때면 뒤에서 내 겨드랑이에 양팔을 끼워 밀어 올려 주었고, 미끄러운 구간이 시작되면 앞에서 양손을 잡고 끌어올려 주었다. 물에 젖은 종잇장같이 너덜너덜해진 나는 포터가 아니었으면 이다음 장면은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포터가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새하얀 함박웃음을 지었다. 천근 같은 다리를 억지로 잡아끌어 마지막 둔턱을 디뎠다.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이동한 듯, 아득한 밀림에 가려 내내 보이지 않던 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투명한 칼데라 호수에 구름과 하늘이 가득 담겨있었다. 구름이 호수 속에, 눈앞에, 발치에서 떠다녔다. 어떠한 효능이라도 발휘할 것 같은 샛노란 꽃들이 화환 머리띠처럼 호숫가에 둘러져 있었다. 하늘색과 하얀색, 연두색과 노란색이 총천연색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비소케****정상은 지상에서 3,711m 떨어진 새로운 세상이었다. 직경 약 400m의 넓은 호수에서 산뜻한 물 냄새가 올라오고 산 아래에서 새소리가 잔향처럼 메아리쳤다. 사람들 얼굴 위에서 반짝이는 물방울이 힘겨웠던 시간을 증명하며 현실감을 주었다. 하늘에 잠시 머리를 파묻었다. 사진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은 금세 흐려지지만 오감으로 체험한 장면은 생생히 남아 마음 깊이 뿌리내린다. 비교적 수월했던 내리막은 기억에 남지 않고 사라졌지만, 산을 오르는 동안 느낀 두려움, 깊은 밀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포는 그대로 남았다. 오르고 나서 보니 산은 사람들을 겁줄 의도가 전혀 없었다. 산은 버팔로와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았다. 산이 주는 것을 먹고 거름으로 되갚으며, 억지로 길을 내지 않고 다니는 버팔로에게 산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보금자리를 내어주었다. 우리도 길을 넓히거나 깎지 않고, 물길을 바꾸지 않고 산을 오르내리기만 한다면 산은 언제까지고 우리를 반가운 얼굴로 맞아줄 것이다. 


*Karisimbi, Bisoke, Sabyinyo, Gahinga, Muhabura
**이차이(African tea): 우유와 설탕을 타서 먹는 생강차
***버팔로: 본문의 버팔로는 대형 우제목 중 아프리카물소(Syncerus caffer)를 지칭

****비소케(Bisoke): 콩고와 르완다 사이의 화산 



비소케, 2019, 박초롱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에서 여름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