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인문학
도검류와 같은 무기를 사용해 전쟁을 치를 때 정확한 기술을 구현해서 상대방에게 적중시키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훈련을 하게 되는데 가장 쉽고 간단한 기술은 찌르기였다. 이 찌르기는 무기가 칼 이어도 가능하고, 창 이어도 가능하고, 죽창이나 막대기여도 상관없다. 무기의 끝만 상대를 향한다면 충분한 충격과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병을 상대로 한 기술 중 가장 유효한 기술은 창의 손잡이 쪽을 땅에 꼽고 날을 상대방으로 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유리한 전술이었다. 영화 300의 팔랑크스 전술이나 마케도니아의 사리사 전술은 그 대표적인 전술이다. 하지만 찌르기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찌른 후 필연적으로 무기를 뒤로 빼는 동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하게 박혀버린 창이나 칼이 빠지지 않아 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그 상태로 부러져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에 비해 날을 이용한 베기라는 공격은 바로 다음 공격으로 이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긴 했으나, 이것도 상대방이나 목표물에 단단하게 박혀버리면 빠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겨서 일직선 형태의 날보다는 휘어져 있는 형태의 날을 선호하게 되었다. 날이 휘어져 있으면 공기 저항도 적어져 운용하기도 편했으며 쉽게 베어지는 효과가 있어 박혀버리는 경우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찌르는 형태의 무기는 앞을 뾰족하게 하기 위해 양쪽을 갈게 되었고 베기 위한 무기는 한쪽에 날을 세우고 조금 휘어지도록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양날검은 양쪽으로 날을 내는 과정에서 단면이 마름모 형태가 되고 자연스럽게 면적이 작아져 무게가 줄어들어 휴대가 편해지자 한 손으로도 운용할 수 있게 됨으로서 근거리 호신용과 의례용으로 그 자리를 잡게 되었다. 외날 검은 곡도의 형태를 띠게 되면서 한쪽에만 날을 세워 같은 길이의 양날검 보다 더 무겁다 보니 파괴력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와 용도로 검과 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않았고 언제든지 혼용되어 사용되곤 하였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왕의 호위무사인 운검(직급의 명칭이기도 했고 무기의 이름이기도 했다.)에게 지급된 “별운검”은 ‘검'이라는 이름이 붙지만 완만하게 휘어진 곡도이며 외날이다.
조선시대인 1790년에 집필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는 “칼의 양편에 날이 있는 것을 검이라 하고, 한쪽만 날이 있는 것을 도라 한다”라고 하였다가, 조선 후기(1813년)에 편찬된 융원필비(戎垣必備)에 따르면 “도는 자루가 길고 칼날이 휘어져 있으며 손잡이 머리가 있었다. 검은 자루가 짧고 칼날이 길며 칼집이 있었다”라고 하여 다른 의미로 분류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책 모두 “후세에 와서 도와 검이 서로 혼용되었다”거나 “오늘의 사람들은…분별하지 않고 모두 도라고 부른다”라고 적어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흉기가 될 수 있는 날붙이는 “도”라는 이름을 붙여 일단 창이나 둔기와 같은 다른 무기와 구별하고, 예법과 도를 지킬 수 있는 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날붙이는 칼집을 만들어 구분하고 특별한 명칭을 주기 위해 "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고유한 용도나 특별한 조직에서만 사용한 칼이나 특별한 인물이 사용하던 특별한 칼, 쉽게 말해 네임드 혹은 레전드에 검이라는 이름이 따라붙으며 도와 검이 혼용된 사례가 많아졌다고 보면 되겠다.
위의 “별운검”의 예도 그러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칼로 유명한 두 자루의 칼도 조선의 환도(還刀 고리(還)가 있어 끈 등으로 묶어 휴대할 수 있던 칼의 이름이지만 조선시대 개인 무장용 칼은 다 환도라 불렀다.)이지만 유달리 길고 특별한 존재로 “쌍룡검(雙龍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쁜 일을 물리치려고 ‘인년 인월 인일 인시(四寅)’에 만들어 주술적인 용도에 사용된 칼의 이름도 “사인검(四寅劍)”이다. 일본의 무예로 알려져 있는 검도는 휘어진 한쪽 날의 진검을 사용하여 베기를 단련하기 위한 무예이지만 '도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검도'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