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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Apr 05. 2024

내 착각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요



착한 아이


국민학교 1, 2학년쯤이었을까. 하루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의자를 책상에 올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셨다.


장현준, 너 먼저 집에 가봐. (이때 난 아직 폴챙이 아니었다. 참고: 내 이름은 어쩌다가 폴챙이 되었나)


가끔 선생님이 착한 아이들부터 순서대로 집에 보내주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갔다. 다음 학교에 가보니 친구들이 말했다.


야, 어제 너 집에 가고 우리 다 벌섰어.


선생님은 도대체 나를 얼마나 착하게 본 것일까. 친구들에게 미안했지만 왠지 더 뿌듯했다. 난 더 착한 아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20살이 넘은 어느 날 문득, 이 기억이 떠올라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때 선생님이 나를 예뻐해서 먼저 집에 보내고 다른 애들은 벌을 세웠었더라고. 근데 엄마는 그 선생님의 성함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아, ㅇㅇㅇ선생님~? 그 선생님이 너네 형 담임선생님도 하셨었잖아. 그 선생님이 은근히 돈 찔러주기 바라는 걸로 유명하셔서 그때 엄마가 없는 살림에 겨우겨우 10만 원 챙겨드렸었거든. 근데 너 담임선생님 되셨을 때는 못 챙겨드렸었는데 그래도 잘해주셨네?


아... 왠지, 그 일 후로는 나 먼저 집에 보내주시는 일이 없더라니.


그래도 나는 착한 아이라는 착각에 나는 조금 더 착한 어른이 됐을까?






청바지맨


난 어릴 적 바지를 잘 안 갈아입었다. 바지는 지저분해져도 티도 잘 안 나고, 바지는 코랑 멀어서 냄새도 잘 안 난다. 그때 나에겐 청바지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맨날 그 청바지만 입고 다녔다.


나는 청바지가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 입고 다닌 건데, 친구들은 내가 청바지를 좋아해서 청바지가 많은 줄 착각했는지 나에게 청바지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스티브잡스가 미국에서 검은 터틀넥만 입는 사람으로 유명해지기 전, 대한민국 강원도 철원에는 맨날 청바지만 입는 청바지맨 폴챙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스티브잡스는 옷장 가득 터틀넥이 있었던 반면 난 청바지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달까.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친구들은 나를 옷장에 청바지가 가득한, 청바지가 좋아서 청바지만 고집하는  패셔니스타로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청바지를 새로 사줬다. 새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간 그날, 공교롭게 조회 시간에 무슨 상장을 받을 일이 생겨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교단 위로 올라갔다. 수줍게 올라가서 상장을 받고 다시 내 자리로 걸어가는데, 한 친구가 나를 보고 말했다.


오~ 장현준~ 청바지 새로 생겼네?


그때 난 깨달았다. 청바지맨이라는 별명은 옷장에 청바지가 가득한 패셔니스타라는 의미가 아니라, 바지라곤 청바지 한 벌 밖에 없는 애라는 뜻이었다는 걸.






자넨 이 세상을 바꿀 인물일지도 몰라


대학교 시절 교회에서 성가대를 했다.


작은 교회 성가대에선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고, 어른들은 젊은 나이에 어른들 사이에서 성가대를 하는 나를 기특해하셨다. 특히 그중 우리 부모님 연배의 집사님 부부가 나를 좋아해 주셨다.


어느 날, 나를 좋아해 주시던 남자 집사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시더니 진지하게 물으셨다.


폴챙이가 몇 년생이었더라?


88년 생입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나를 사뭇 더 진지하게 바라보시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셨다.


88년에 태어난 사람 중에 세상을 바꿀 인물이 나온다더라.


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교회에서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내가 세상을 바꿀 인물처럼 보여서 내가 몇 년생인지 물으신 건가?라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인상이 좋긴 좋구나.


그런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다른 집사님이 내게 말했다.


폴챙아, 큰 의미 두지 마라. 저 집사님 둘째 아들이 88년 생이다.






자기는 처음부터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요즘 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가수 소유와 정기고의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라는 가사의 노래 <썸>이 아직 한참 히트를 치던 2014년 말, 나는 교회에서 제일 예뻤던 내 아내를 처음으로 봤다.


생전 어디서 제일 예쁜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었던 난,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그러다 그녀가 어떤 봉사활동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입수했고, 나도 자원해서 그녀와 시간을 보낼 기회들을 만들어 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가 매력이 있는 건 알았지만 그녀는 내게 너무 쉽게 넘어왔다. 내가 데리러 간다는 제안과, 봉사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저녁을 같이 먹자는 제안에도 흔쾌히 응했다. 이런 걸 서로 한눈에 반했다고 하는 건가?


결국 그렇게 썸을 타다 우린 사귀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나중에 아내에게 사귀기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땐 내가 오빠한테 관심이 있는 건지 긴가민가한 정도였는데 오빠가 자꾸 고백하니까 내가 솔직하게 내 마음이 이런데 만나도 괜찮겠냐고 물었었잖아.


아, 그러긴 했지. 근데 그럼 나랑 차는 왜 같이 타고 갔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우리 둘만 탄 게 아니라 다른 언니들도 같이 탔잖아.


아, 그래 그러긴 했지. 그럼 나랑 밥은 왜 먹었어?


그건 남자대 여자로 먹은 게 아니라 그냥 인간대 인간, 그냥 친구 사이에 밥이나 먹은 거지. 난 내가 좋아하면 내가 먼저 다가가는데, 내가 먼저 밥 먹자고 한 적은 없잖아?


아...






인간은 착각을 하고 산다


결국 나는 착한 아이도, 패셔니스타도, 세상을 바꿀 인물도, 그리고 교회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첫눈에 푹 빠져버린 남자도 아니었다.


그래, 인간은 누구나 착각을 하고 산다.


그래도 난 여러 착각 속에서 꽤나 착한 어른이 되었고, 이젠 옷장에 바지도 몇 벌이나 있고, 세상은 못 바꿔도 내 인생은 매일 조금씩 바꾸고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결혼에 성공했다.


이 정도면 꽤나 쓸모 있는 착각들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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