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영 Dec 25. 2022

산타의 환상

아이들이 어렸을 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게 일이었다. 늘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자영업 부부에겐 더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매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물을 목 빼고 기다리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때만 되면 마음이 분주해졌다. 원하는 게 확실할 땐 그나마 나았다. 그걸 찾아 준비하면 되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엔 산타 할아버지가 뭘 주셨으면 좋겠어?" 무심한 척 물으면, "안 가르쳐줘! 할아버지랑 우리만 아는 비밀이야." 하거나 "뭐든 우리가 좋아할 만한 걸 주실 거야." 하는 식이다. 이때 알아챘어야 했다!


우리 부부는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선택 장애에 빠져서, '이번엔 뭘 사줘야 해?' '당신이 생각해 봐.'를 반복하는 무한 핑퐁 게임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큰 아이 3학년 때 우린 결심했다.

"여보, 이젠 책을 사주자. 이제 곧 4학년인데 장난감 보단 책이지."

남편 눈이 빛났다. 책이라면 훨씬 수월하니까. 우리는 당장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가서 나름 열심히 책을 골랐다. 큰 아이에겐 동화책을, 작은 아이에겐 그림책을 각각 머리맡에 두고 나니 마음이 뿌듯했다.

"됐어! 앞으론 책을 사주자!" 남편과 나는 의기투합하며 쿡쿡 웃었다.


그림출처 : https://pixabay.com


"산타 할아버지가 이번엔 뭘 주셨어?" 아침에 아이들 기색을 살피며 우리가 물었다.

"엄마, 난 책 안 좋아하잖아." 작은 녀석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인데 왜 엄마한테 불평해?" 왠지 모르게 살짝 불안했다.

"엄마, 이거 백화점에서 엄마가 사 온 거잖아. 책에 **한 세상 백화점 스티커가 붙어있어." 큰 녀석이 거든다.

허겁지겁 책표지를 열어보니 진짜 백화점 스티커가 앞 뒤 표지 안쪽에 두 개씩이나 붙어있었다. 이걸 못 보다니! 산타 할아버지가 **한 세상 백화점 안에 있는 서점에 가서 책을 샀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당황하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엄마, 우린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거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근데 왜 크리스마스 때마다 머리맡에 선물 있다고 좋아했어?"

"그건 엄마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지." 큰 아이가 생색내듯 말하자 작은 녀석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헉!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환상은 오히려 나한테만 있었단 소리야?


큰 아이 학교 가기 1년 전 잠시 다닌 어린이집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 분장을 한 선생님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선물을 전해주는 행사를 했었는데, 아이들은 그때 알았단다. 이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는 걸. 진짜 산타가 있었다면 분장한 게 다 티 나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한밤중에 산타 행세를 하며 나타나진 않았을 거라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산타를 믿길 바란 게 좀 무리인가 싶으면서도 이미 한참 전에 산타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린 건 왠지 많이 아쉬웠다. 


매년 크리스마스만 되면 TV에 단골로 나오는 영화 중에 <폴라 익스프레스>가 있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동명 그림책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소년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북극행 특급열차를 타고 가서 산타 크로스 할아버지를 만나는 이야기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산타의 방울을 꺼내 흔들어 본다. 맑고 은은한 방울 소리는 소년과 친구들과 동생만, 그러니까 산타를 믿는 어린이들만 들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의 친구들도 동생도 방울 소리를 못 듣게 되었지만 년만은 여전히 그 소리를 들었다. 산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 < 폴라 익스프레스>


나도 우리 아이들이 소년처럼 아름다운 방울 소리를 좀 더 오래 듣길 바랐다. 그런데 7살도 되기 전에 이미 환상이 깨져버렸다니! 더구나 아이들은 이미 알면서도 엄마의 환상을 지켜주려고 아무 말도 안 했단다. 흠... 말하면 매년 받던 선물을 못 받을까 봐 말하지 않은 건 아닐까? 그런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는데도 나는, 아빠 엄마가 설레며 (사실은 스트레스받으며) 자기들 선물을 사고, 자기들이 잠든 새 머리맡에 물건을 놓으며 킥킥거리고, 다음날 아침 기대에 차서 자기들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ㅠ 역시 산타의 환상은 엄마 몫인가?



어제 해울님의 글을 읽고 댓글 달다가 해울님을 기대하게 만드는 바람에, 그 시절 추억을 소환해봅니다.^^

 

https://brunch.co.kr/@0707d9594a104b8/227#commen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