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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Aug 29. 2023

아버지라는 자리 2

그림책 <대단한 무엇> 다비드 칼리 글, 미겔 탕코 그림

벽면 가득 가족사진이 걸려있는 방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 <대단한 무엇>의 첫 장면은 앞서 소개한 <진정한 챔피언>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진정한 챔피언>에서는 사진이 아닌 초상화가 잔뜩 걸려있는 벽면과 한쪽 구석에 주눅 든 표정으로 서 있는 아이가 대조를 이룬다. 초상화는 모두 스포츠 챔피언인 몰레스키 집안사람들의 것으로 인물마다 옷차림이며 행위, 표정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초상화의 크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에 비해 <대단한 무엇>에서 가족사진은 아기자기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커다란 창문과 창문 사이 오밀조밀하게 걸려있는 사진들을 보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넓은 거실, 편안해 보이는 소파를 뒤로 하고 벽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아이는 그 옆에 주저앉아 가장 편한 자세로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흐릿한 형체만 보이는 사진 속 인물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감에 더 집중하게 된다.     


<대단한 무엇>  다비드 칼리 글, 미겔 탕코 그림

“이분은 앙구스 삼촌이란다. 경찰의 자랑이었지.” 그림책의 한 면에는 아버지의 설명이, 다음 면에는 자랑스러운 앙구스 삼촌의 사진을 한 면 가득 확대한 모습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다음 면은 안에서 한 번 더 열리도록 접혀있다. 매 가족사진마다 반복되는 구조다. 조심스럽게 접힌 면을 열어보면!      


삼촌은 바로 옆 건물에서 도둑이 훔친 물건을 들고 나오는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 어떤 냄새든 단박에 알아챈다는 그 앙구스 삼촌이 말이다. 심지어 바로 등 뒤에서 소매치기가 신사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데도 삼촌은 한없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유유자적 걸어갈 뿐이다.      


소방관이었던 도리스 고모는 불을 꺼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방해만 되는 존재다. 챔피언이었다는 티보 삼촌도 그림 속에서는 무리에서 한 바퀴나 처져서  달린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도리스 고모는 자랑스러운 소방관이고 티보 삼촌은 멋진 챔피언이다. 아들이 묻는다. “저는 나중에 뭐가 될까요?” 아버지가 대답한다. “뭐가 되든, 대단한 개가 될 거다!”     


사진 속 친척은 한결같이 밝은 표정이다. 스쿠터 삼촌은 자신이 돌보는 양들이 즐겁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 비록 양들이 신나게 즐긴 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는 했지만. 그리는 걸 좋아하는 프리다 고모는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하다.     


아들이 다시 묻는다. “저는 나중에 뭐가 될까요?” 아버지는 망설이지 않고 답한다. “뭐가 되든, 대단한 개가 될 거다!” 아버지는 결코 단정적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대단한 개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아니 사실은 “대단한 고양이가 될 거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맞다. 아버지의 아들은 개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개든 고양이든 그것조차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 뭐가 됐든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점은 변함없으니까.     


 그림책 <대단한 무엇>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상징적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길을 제시할 뿐 아이의 앞날을 정해놓지 않는다. 뭐가 되든 대단한 주체가 될 거라는 아버지의 믿음은 아이에게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준다. 상징적 아버지의 역할이 주체가 상징계에서 타자를 믿고 마음껏 원하는 대상을 욕망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림책 <대단한 무엇>의 아버지는 그런 상징적 아버지를 착실하게 대리하는 지금, 여기, 바로, 오늘, 우리들이 희망하는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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