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만 셋이라도 괜찮아요.
“하이고~ 아들만 셋 인갑제. 엄마는 딸이 있어야 하는 기라!”
소아과 대기실 안이 소란스럽다. 조용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시선을 나로 향한다. 옆에 앉은 할머니 한 분께서 등을 툭툭 치시며 말씀하시는 거였다. 아들만 셋을 데리고 병원 로비에 쪼르륵 앉아있는 내 모습이 띄었나 보다.
‘뭐라도 좀 찍어 바르고 나올걸 그랬나’
밤새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막내를 들처업고 세수만 겨우 하고 나온 터라 내 몰골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 나이 33살. 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기에는 나름 젊다면 젊은 엄마였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대기실 한켠에 마련된 어항 쪽으로 아이들을 이끈다. 어항에 비친 내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세수만 하고 나온 것 같은 얼굴에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아기띠를 둘러멘 채 서 있는 30대 여자가 거기 있었다.
그렇다. 나는 아들 셋 엄마다. 중국집을 운영하는 남편은 나와 동행한 적이 드물었다. 한 명이 아파서 병원에 가더라도 아이들끼리 놔둘 수가 없어 셋을 다 데리고 다니곤 했다. 그럼 어김없이 어디에선가 혀를 차며 한 마디씩 해주는 어르신들과 만났다.
을지로 5가. 방산시장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우리는 가게 근처에서 살아야 했다. 살던 아파트는 말이 아파트였지 70년대 초반에 지어져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7층짜리 복도식 건물이었다. 시장 안에는 아이들을 진료하는 소아과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기가 안 좋았던 아이들은 특히 밤에 잘 아팠다. 감기에만 걸렸다 하면 열감기로 와서 밤새 끙끙 앓았다. 덩달아 나도 잠을 못 잤다. 40도가 넘어가면 해열제를 먹이는데 약을 먹고도 2시간이 지나도록 열이 안 잡히면 성분이 다른 해열제를 교차해서 먹여야 했다. 아이들은 열이 나면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고 무엇보다 칭얼대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새 열감기를 앓는 아이 옆을 지키다가 날이 밝으면 집을 나섰다. 병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기 위해 새벽의 찬 기운을 몸으로 맞아내었다.
눈도 채 못 뜨는 아이들을 채근해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소아과는 항상 환자들로 붐볐다. 시계만 계속 쳐다본다. 가게로 출근하려면 최대한 빨리 진료를 봐야 하는데 대기줄은 줄어들지 않고 자꾸자꾸 시간만 간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데 왜 내가 보는 시계만 빨리 움직이는 건지 부지런한 초침이 원망스럽다
다행히 예상한 시간 안에 진료를 받고 나온다 하더라도 숨 돌리는 건 사치였다. 약국으로 향한다. 얼른 약을 받고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해야 했다. 아이들과 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비타민 하나 사달라는 아이들과 몸에 좋지도 않고 비싸기만 한 거 안 사주겠다는 나와의 한판 승부. 지금 같아서야 하나쯤 사줘도 큰일 나지 않는다지만 그때는 왜 그런 사소한 것조차 허용하지 못했는지....
‘약국은 약을 파는 곳인데 도대체 뽀로로 비타민은 왜 갖다 놓는 건지!’
모든 게 다 마음이었다. 마음이 조급하고 여유가 없으니 만사가 다 짜증 나는 일 연속이었다. 괜히 약사한테 원망의 화살이 돌아가고 떼 부리는 아이들은 그저 나를 힘들게 하려고 태어난 것 같았다. 걷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질질 끌고 또다시 버스에 오른다. 학교와 유치원에 차례로 던지듯이 보내 놓고 허둥지둥 가게로 출근을 한다. 아이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그만큼 더 마음만 바빠졌다.
태생적으로 나는 모성애는 없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챙겨가며 커왔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나 그리웠다. 결혼을 일찍 한만큼 아이 얼른 키워놓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집에서 해방되어 내 가정을 꾸리고 나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더군다나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을 줄은 몰랐다.
처음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신기하기만 했다. 새 생명을 내가 탄생시킨다는 사실이 거룩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까맣고 풍성한 머리숱과 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찹쌀떡 같은 양쪽 볼을 가진 아이를 받아 안는 순간 출산 당시의 고통을 싹 지워버렸다. 조산기로 7개월부터 누워서 지내야만 했던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싹 지워져 버렸다. 아이 낳기 전엔 다시는 임신 안 한다며 큰소리쳤던 사실이 무색해질 만큼 내 새끼가 소중했다.
18개월까지 모유수유를 했다. 두 돌까지 먹이고 싶었는데 밤중 수유를 계속하는 게 아이에게 안 좋은 걸 배웠다. 밤중 수유를 끊자마자 저절로 수유량도 줄었다. 결국 단유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2달 만에 둘째 아이가 생겼다.
둘째 아이는 아프게 태어났다. 구순구개열이었던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여기에만 매달렸다. 다른 아이들과 섞여도 거의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 나의 온 마음은 둘째 아이에게 가 있었다. 올해 14살인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수술대에 올랐다. 태어난 지 백일 무렵의 핏덩이를 수술대위로 올리는 날, 나는 혼자였다. 일하느라 가게에 메여있던 남편은 수시로 전화를 했다. 가게문을 닫는 걸 상상조차 못 하는 남편에게 그저 서운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모두 남의 일 대하듯 하셨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 팔자려니 했다.
‘내 주제에 무슨...'
내 팔자보다 아프게 태어난 둘째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백일, 돌, 6살, 10살 아이는 무려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을 겪게 한 것이 못내 한없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또래 아이들이 한번 올라갈까 말까 한 수술대 위를 네 번이나 올리게 한 나 자신이 미웠다.
이 아이를 가졌을 때 마음을 좀 단단히 해 둘 걸......
먹는 걸 좀 조심했어야 했나......
차라리 세상 나쁜 년이 되더라도 아버님 모시고 살지 말걸 그랬나 봐......
도대체 너는 엄마란 애가 네 새끼 하나 지키지 못하고 뭐한 거니....?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듯이 편하란 법도 없나 보다. 둘째 아이의 급한 수술이 정리되어갈 즈음 나에게 새 새명이 찾아왔다. 갑자기 찾아온 소식에 나 역시 사람 인터라 나쁜 생각을 많이 했다. 이제 좀 편해지나 싶었는데 다시 출산, 육아를 반복해야 하니 달갑지 않았다. 둘째 아이처럼 또 아픈 아이가 태어날까 봐 지레 겁부터 먹었다.
흔들리는 나를 잡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우리에게 찾아온 생명이니 분명 복덩이일 것이라며 나를 붙잡아주었다. 분명 막내 아이는 나를 위한 아이일 것이라 다독여주며 한순간 잠시나마 나쁜 마음을 먹었던 나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들 셋 엄마가 되었다. 막내는 순했다. 신생아 때도 밤중 수유 거의 없이 통잠을 잤다. 눕혀놓아도 칭얼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내가 아무런 노력을 안 해도 자기 혼자 손가락 쪽쪽 빨다가 잠들기도 했다. 미간이나 앞머리를 삭삭 문질러주면 잠들기도 했다. 막내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산후조리는 없을 거란 생각에 욕심을 부려 2주에 240만 원 하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 아이도 순했고 큰아이와 작은아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산후조리원까지 들어가 호사를 누렸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몸이 말썽이었다. 아이가 순한 덕분에 세 아이들 중 가장 편한 산후조리기간을 보냈음에도 산후조리원에서 나오자마자 대상포진이 왔다.
아이에게 수유를 하려면 아이를 안아야 했는데 누워도 앉아도 바늘로 온 몸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화장실에 가야 할 때면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꼿꼿이 서는 것 같았다. 셋째 아이를 낳고 나니 면역력 게이지가 한계에 도달했던 모양이다. 수유 중이라 독한 약을 먹을 수가 없어 그저 입술만 질끈 깨물어가며 시간만 지나길 기다렸다. 대상포진이 잠잠해지자 이번엔 두드러기가 출현했다.
백일의 기적이라고 했던가. 신생아를 키우는 집은 백일만 기다린다. 아기들이 백일이 지날즈음이면 엄마도 아기한테 적응을 하고 아기도 세상에 적응을 하여 좀 편해진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막내 아이는 순했기 때문에 백일의 기적을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백일의 기적을 아기가 아닌 내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막내를 낳고 백일 간을 내 몸과 싸웠으니 말이다. 20대 때 낳은 거랑 30대 때 낳은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들이 셋 있는 엄마라고 말하면 한결같이 놀란다. 아이를 많이 안 낳는 추세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이를 어리게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들만 있다고 해서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들이 셋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한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는 놀라는 표정과 감탄사를 보내고 바로 이어서 측은한 눈빛이다. 삼 남매인 우리를 키우신 엄마도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종종 하셨다는 걸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 셋은 힘든가 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당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듣고 자괴감에 빠지셨다고 한다.
“아이고~ 어쩌다 미개인이 되셨어요?”
지금 시대에 와서 담임선생님이 학부모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그때는 그게 허용되던 시기였다. 아이가 잘못하면 교사의 체벌도 용인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시기에 아이 셋을 키우시던 엄마에 비해 최소한 나는 아이들 데리고 밖에 나가면 ‘애국자’ 소리를 듣고 있으니 지금이 더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혼자가 편하던 내가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손이 덜 가는 지금, 돌이켜보면 태생적으로 모성애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을 줄만 알았던 내가 이제는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단단해지려고 한다.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건가 보다. 딸이 없어도 괜찮다. 정작 아들 셋을 키우고 있는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다들 그저 안쓰럽다 하고 대단하다고 하신다. 왜 꼭 골고루 성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 아들만 셋 키우는 것도 꽤 재미있고 괜찮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