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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자마녀 Jun 12. 2020

열심히 사는데 왜 나는 제자리에 머물러있을까

열심히만 산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더라.


  열심히 살았다. 매일같이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려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도 나의 삶은 왜 이 자리에서 계속 머물러만 있는가.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다 발전해가는데 나만 머물러있는 격이니 오히려 후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한 것이 정작 아이들과 눈 한번 맞출 시간조차 부족할 정도로 일에 매달렸다. 나중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지금의 시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열심히만 사는 삶 속에서 정작 우리 가족의 행복은 없었다. 삶은 아직도 다 쓰러져가는 7층짜리 건물의 5층에 살고 있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다 쏟아부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내가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가게 일과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온 지난 시간 속에 정작 ‘나’를 잃고 살았다.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맨 뒤에서 뛰어가는 느낌이지???

  누군가와 약속시간을 잡을 때도 가게에 지장을 주지 않는 시간으로 잡으려 하다 보니 어느새 대학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어졌다. 아이들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때도 가게에 나가야 하는 시간을 다 계산해서 다녀와야 했다.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들도 나와 약속을 잡기 위해 가게 쉬는 날을 먼저 물어오곤 했다. 어느새 친구들과의 만남도 횟수가 줄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에게는 되는 시간이 나에게 안 되는 시간이었던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보다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가 먼저 떠올랐다. 마트에 가서도 내가 좋아하는 물건보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반찬 한 가지를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반찬보다 아이들이 잘 먹는 반찬을 했다. 일정을 잡을 때도 아이들 좋아하는 곳으로 약속을 잡았다. 내가 살아가는 내 인생이고 나의 삶인데 그 중심에 ‘나’는 없었다.




  내 집 마련도 결혼한 지 14년 만에 했다. 그동안 남의 집에서 전세나 반전세를 살아왔던 이유는 돈 없이 밑바닥에서 시작한 탓도 있지만 남편이 내 집 장만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내 가게에서 장사하는 게 꿈인 사람이었고 나는 아내이니까 남편의 뜻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내 집한 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내 생각을 누르고 남편 생각에 맞춰 살았다. 삶의 기준이 ‘나’가 아닌 우리 가족이었다. 


  막내가 3살 되던 무렵 을지로 5가에서 하던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됐다. 둘째 아이의 병원을 전전하며 어린 막내까지 케어해야 했기에 가게에 온전히 있지 못하게 되자 남편 역시 힘들어졌다. 직원을 관리하고 매출을 끌어올리고 재무관리에 손님 상대까지 해야 하는 등 나와 나누어하던 몫이 남편에게 많은 부분 넘어가게 되자 남편도 힘에 부치게 된 것이다. 


  가게는 늘 바빴고 매출이 오르니 자연스레 가게를 팔라고 하는 연락이 자주 왔다. 그러던 차에 거래처에서 줄곧 가게를 넘기라는 협상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남편과 나는 좋은 조건일 때 가게를 양도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많이 지쳐있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가게를 양도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다. 그때가 2014년 3월이었는데 다행히 학기초였던 때라 가게에 메여있지 않고 아이 상담을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항상 아이 담임선생님과 상담예약을 할 때면 이 날은 누가 출근을 안 하니 내가 못 가고 이 날은 아이 병원에 가야 하는 안 되는 등 이것저것 따졌다. 가게를 안 하니까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거였다. 남들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에도 행복할 수 있다니...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들과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가만히 앉아서 아이들 노는 것만 봐도 흐뭇했다. 아이들이 물을 엎질러도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조용히 달래서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난 간 일련의 일들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한 달간은 좋았다. 한 달이 지나가자 집에서 생활하는 비용들이 고정되어 있었고 씀씀이도 이미 커질 만큼 커졌는데 수입이 없으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남편도 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슬슬 가게를 다시 하려고 준비를 했다. 가게를 양도한 지 2달 만에 새로운 가게를 시작했다. 긴박한 시간들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새로 오픈한 가게는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배달 코스도 더 넓었고, 사람도 더 많이 필요했다. 시장 안에서 장사할 때는 가게 상호만 외우면 됐는데 주택가에서 장사를 하니 주소가 중요해졌다. 베테랑인 남편도 새로 시작한 가게에서 적응하는데 고생 꽤나 했다. 5명의 직원을 관리할 때도 어려웠는데 직원이 9명으로 늘어나자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그 몇 배로 더 생겼다. 더불어 내가 가게에 나와있어야 하는 시간도 더 길어졌다. 




  가게를 옮기면서 집도 가게 근처로 옮겼다. 아들이 셋이라 1층 집을 알아봤는데 시간도 촉박했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갈 수 있는 전세 매물도 별로 없어서 하는 수없이 언덕 꼭대기에 바로 이사할 수 있었던 3층 빌라를 얻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이전에 살던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실도 넓었고 주방도 있었다. 냉장고가 더 이상 방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됐고, 아이들이 뒹굴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는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고 싶다고 하면 구석에서 낑낑대며 꺼내 줬다가 밥 먹을 때면 다시 접어 제자리에 가져다 놨어야 했다. 새로 이사한 곳에서는 한쪽에 미끄럼틀을 꺼내 줘도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접지 않아도 됐다. 물론 눈에는 거슬렸고 거실 절반을 차지하긴 했어도 말이다. 이사한 당일 미끄럼틀을 꺼내 줬다가 봉변을 당했다. 2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올라온 거였다. 


아유~
아들이 셋이나 있어서 그렇구나!
천장에 달려있는 전등이 다 흔들리길래 올라와봤더니... 


   

  그렇다. 새로 이사한 집은 층간소음에 취약했다. 돈에 맞춰 이사하다 보니 그 점을 미리 체크하지 못했던 거였다. 아들 셋을 키우고 있는 우리에게 층간소음은 쥐약이었다. 층간소음을 막아주는 매트란 매트는 다 검색했다. 몇 날 며칠 동안 수소문 끝에 4cm 두께의 매트를 사다가 거실에 전부 깔았다. 매트 가격만 30만 원이 넘었다. 


  소용이 없었다. 2층 아주머니는 하루에도 두세 번 내가 집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올라오셨고 그때마다 고개 숙여 죄송하다 말씀드렸다. 하루는 아이들이 앉아서 사과를 먹으며 웃고 이야기할 때도 올라오셨다. 어떤 날은 1층에 사는 아주머니와 함께 올라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계단 난간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셨다.  


3층~~~~~~!!!! 3층~~~~!!!!     


  그때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억울했다. 집을 좀 튼튼하게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매트가 깔려있지 않은 곳을 걸어 다니다 보면 바닥이 울렸다.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 왜 이건 체크하지 못했던가. 나 자신이 많이 원망스러웠다. 1층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놈의 돈이 원수다. 돈이 있었으면 날짜에 쫓기듯 급하게 이사하지 않았어도 됐고 아파트로 갔어도 됐다. 아파트 1층을 보러 간 적도 있었지만 그때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어림없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이 있어야 한다.


  3층 빌라에서 사는 2년 동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마음껏 웃거나 떠들지 못했다. 조금만 소리 내어 웃고 떠들어도 어김없이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 다닌 건 기본이었다. 4cm 두께의 층간소음방지 매트를 깔고도 늘 조심하란 소리를 달고 살았다. 그때 아이들 나이 초4, 초1, 3살이었다.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하는 남자아이들이 셋 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다녔다. 발자국 소리에도 1층, 2층에서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1층 도시가스 배관에 묶어둔 적이 있었다. 원래는 3층 우리 집까지 들고 올라와야 하는데 매일 들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아이들이 힘들어해서 내가 1층에 놔둬도 된다고 했다. 양옆으로 다른 자전거도 묶여있길래 빈 공간에 아이들 자전거도 놔두면 아이들도 편하고 나도 편할 것 같아 그러라고 했다. 


  하루는 가게에서 밥을 먹여 집에 보냈는데 집에 올라간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큰 아이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1층 아줌마가 둘째 아이를 호되게 야단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야생의 세계에 아이를 덩그러니 놔둔 것만 같아 얼른 아이 곁에 가고 싶었다. 다리가 이렇게도 주인 말을 안 듣는 신체기관인지 느껴졌던 때도 없었다. 마음은 벌써 집까지 뛰어 올라갔는데 아직도 내 몸이 여기라 답답하기만 했다. 


  집에 올라가 보니 두 눈이 시뻘게진 큰아이와 눈물, 콧물 다 쏟아 가슴과 소매 부분이 흠뻑 다 젖어 앉아있는 둘째가 있었다. 머릿속 화산이 폭발해 이성의 끈을 놓는 것이 이런 거구나. 아이들을 본 순간 이성을 잃었다. 1층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 : 왜 우리 집 앞에 자전거를 놓는 거야!! 보기 싫게시리...!

나 : 아이들이 3층까지 들고 오르락내리락하기 힘들어해서 제가 두라고 한 거예요.

할머니 : 하여간 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는 집구석이구만!!!

나 : 뭐라고 하셨어요? 어른이시면 어른답게 어른인 저한테 말씀하시면 되는 것을 아이들한테 고함을 치시면 어떡합니까!

할머니 : 봤을 때 얘기해야 다시는 그러지 않지! 아주 혼구녕을 내야 돼!!

나 : 제가 그러라고 해서 그런 겁니다! 다른 자전거들은 괜찮고 아이들 자전거는 안 되는 건가요!!

할머니 : ?!@##%%^%&&^*&(


  동네는 시끄러워졌다. 엄마가 아래층 할머니에게 욕까지 듣고 있으니 큰아이가 아빠한테도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남편이 오니 할머니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시고 문을 닫으셨다. 속상한 마음만 있었다. 이 집에서 더 이상 살기 싫었다.  보란 듯이 내 집 사서 이사 가야겠다 다짐했다.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고 내가 가지고 있는 돈들을 그제야 따져보기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전세금 포함해서 1억 5천만 원이 전부였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그 돈이 다 어디 갔지?? 나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동안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다. 한눈팔지 않고 일하고 아이들 키우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다만, 그동안 아무런 전략이나 계획 없이 무작정 그저 열심히만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열심히만 산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구나!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열심히만 살다가 끝이 나게 될 것 같아 두려워졌다. 이렇게 열심히만 살다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자라고 있는 내 새끼들한테 가난의 끈을 물려주게 될 것 같아 무서워졌다. 열심히 살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 


열심히 사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분명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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