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처럼 살기를 선택했던 아이가 전해준 쪽지 한 장
부모님은 엄청 사이가 안 좋으셨다. 그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들이 너무 많아서 버거웠고,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싫고 도망치고 싶었다. 집은 너무 숨 막혔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사자와 사자의 싸움터. 결혼을 빨리했다. 사자와 사자의 싸움터에서 도망치고자 선택한 도피처였다. 어느 날, 여동생과 이야기하기도 했다.
도망치듯 한 결혼이지만
나는 운이 참 좋았다.
생활력 강하고 자상하고
나만 사랑해주고
내가 최고인 줄 아는
남편을 만났으니...
깊이 고민하고 한 결혼이 아니어서
정말 개차반 같은 남자였음
어쩔뻔했니... ㅋㅋ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학교를 다녔고 소중한 생명이 찾아와 졸업까지 한 학기만을 남겨두고 휴학을 했다. 조산의 위험이 찾아와 아이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아이만 바라보며 살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장사를 하고 있었던 터라 아이 낳고 3개월 만에 다시 일을 시작했고 업어가며 장사를 했고 독박 육아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우리 부모님처럼 시부모님도 사이가 안 좋으셨다. 두 분이 너무 싸우시니까 남편은 시아버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면 어떻겠냐며 넌지시 나에게 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착한 아이' 란 말이 좋아서(지금도 그렇지만) 그 기준에 맞춰 칭찬받고 싶어 살았다. 남편이 내게 물었을 때도 나는 늘 착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자고 제안하는 남편의 제의를 거절하면 난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 알았다고 했다. 불편하고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말이다.
단칸방에서 살다가 반지하지만 방 2칸짜리로 이사를 가면서 시아버님도 함께 살게 되었다. 돌도 안 된 젖먹이 어린 아들을 키우며 장사를 하면서 시아버님까지 모시고 사는 삶은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쉽지 않았다. 남편 역시 많은 직원들을 관리하며 장사를 하다 보니 힘들어했다. 내가 힘들다 하면 조금만 더 참아주길 바랬다. 나는 매일같이 어린 아들을 붙들고 울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착한 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못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그때는 미련하게도 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들고 싫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그만인 것을 하루에도 수십 번 친정엄마가 다니시는 한양대병원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속으로 삭히며 그냥 참았다. 숨 쉴 구멍조차 없었던 현실이 마냥 힘들었던 듯하다. 어쩌다 친정에 갈 때도 동행하시는 아버님을 모시고 갔으니까.
그 와중에 둘째가 생겼다.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으니 태교를 하며 마음을 평안하게 해야 했음에도 그땐 어렸고 나와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스트레스와 그 상황을 그냥 다 감내해가며 장사를 하고 젖먹이 어린 아들을 업어 키우며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다.
아이가 구순구개열이에요
임신 계속 진행하실 건가요?
둘째가 나에게 온 지 20주 되는 날, 정밀초음파를 찍던 의사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수술하면 괜찮아진다는 말에, 또 필사적으로 아이를 지키겠다는 남편의 말에 낳기로 했다. 정말 저렇게 묻는다. 아무런 감정 다 배제하고. 남편은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도저히 안 되겠던지 시아버님이 계실 곳을 마련하였고, 아버님은 고향으로 내려가 혼자 사시게 되셨다. 어머님은 아버님과는 절대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셨다. 철없던 26살의 나는 아프게 태어날 둘째를 만난다는 생각보다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단 해방감이 더 컸다.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아이는 진짜로 의사가 말한 대로였다. 산후조리는 다 집어치우고 밤낮으로 그 아이에게만 매달렸던 것 같다. 태어나자마자 백일 때 1차 수술을 시켜줘야 했는데 아이에게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유하는 것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되니 제대로 된 산후조리는 언감생심이다. 특수 젖병으로 간신히 먹여야 했고, 갓난아기의 입에 무시무시한 교정장치를 해줘야 했으며, 아이를 낳자마자 에어컨 바람을 쐬며 병원을 다녔다.
운전할 줄도 몰라서 친정아빠와 남동생에게 부탁해 병원을 다녔었고, 어쩔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이면 아이를 겉싸개로 꽁꽁 싸맸다. 사람들이 다들 나와 아기만 보고 수군대는 것만 같아 병원에서 대기할 때도 구석에서 아이를 꽁꽁 싸매고 기다렸다. 남편들과 같이 온 엄마들은 남편이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의사 보기 바로 직전에 아기랑 들어오던데, 하루 12시간 꼬박 장사하는 남편을 둔 나는 하물며 그 사소한 것 하나도 참 부러웠다.
큰아이는 참 잘 생겼다. 성격도 활발하고 잘생기고 어딜 가도 아이 칭찬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데리고 다니면 나도 모르게 으쓱했던 적도 많았다. 큰아이 때와 달리 둘째 아이는 데리고 다니면 이상한 시선과 함께했다. 더불어 나의 자존감 또한 추락해갔다. 미리 알고 낳은 덕분에 아이의 수술은 제 시기에 맞춰 잘 이루어졌다. 백일 때, 돌이 되던 때, 6살 때, 10살이 되던 해까지 아이는 여태껏 큰 수술을 네 번 받았다. 5살 때부터는 언어치료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 4년. 장사를 하는 와중에 40분에 4만 원 하는 언어치료실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아마 내 인생에 있어서 고생길의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시간을 나눠 쪼개 쓰던 시기, 발을 동동 구르고 시간에 쫓겨 안달복달했고 이동시간에는 무조건 아이 안고 뛰던 스물일곱 살. 매년 연장하던 휴학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았다. 자퇴.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결심을 했고, 남편은 너무나 안타까워했다. 아이가 이렇게 된 이상 대학 졸업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언어치료를 다니기 시작하고 어린이집을 옮기게 된 6살, 아이는 변했다. 남들 앞에서 말을 안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도 않았다. 자신이 하는 말과 친구들의 말이 다름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이야기하는 걸 친구들과 선생님이 알아듣지 못하자 아이는 아예 말을 안 했다. 말로 해결하지 않게 되면서 아이는 감정표현도 서툴렀다. 여유가 없는 삶에 아이의 감정을 받아줄 엄마의 그릇이 작았기에 소심하고 말 잘 안 하고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를 선택한 아이, 둘째의 그림자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밝고 쾌활한 첫째 아이와 너무나도 달랐던 둘째 아이는 그야말로 나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학교에 가게 되고 담임 상담을 가서도 큰아이 담임선생님과는 웃고 떠들며 유쾌한 상담을 하고 둘째 아이 담임선생님 앞에서는 울다 왔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울고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울고... 게다가 아이 2학년 담임은 아이 성향을 아예 이해하려 하지 않으셨기에 아이 마음에 또 하나의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밝고 활달하고 잘생긴 형은 항상 주목을 받으니 둘째 아이는 항상 뒤에서 조용히 그렇게 살았다.
나 역시 그 아이와 더불어 위축되고 소심해져 아이를 품어줄 마음조차 못 가졌다. 화가 나면 이야기를 하고 화를 내고 표현을 해야 하는데 말을 안 해버리고 자기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마음을 닫아버리는 아이 모습에 나도 지쳐 나중엔 퍼붓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볼 생각조차 못했고, 그와 더불어 아이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도 못했다. 막내 아이가 태어나고 막둥이를 키우며 장사하던 내게 둘째 아이는 늘 그림자 같은 아이였다.
하루하루 그냥 내게 주어진 그 생활들을 흘러가는 대로 마냥 내 몸을 내던져 살던 날, 우연히 자기 계발 수업을 듣게 되고 동기들을 만나고 블로그에서 이웃들과 소통하고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너무 잘못 살았음을 뉘우치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내가 너무 못난 엄마, 나쁜 엄마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맨날 화만 내는 엄마, 맨날 피곤해하는 엄마, 맨날 인상만 쓰는 엄마, 맨날 공부만 하라고 하는 엄마. 아이들에게 나는 마녀였다. 너무나도 무서운 마녀.
내가 먼저 사과하면 된다. 그동안 잘못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전부 사과하고 안 그러겠다 다짐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동기들과 이웃들이 해주는 칭찬과 응원의 말과 글을 먹으며 나 역시 밝아지고 활달해지고 여유가 생겼다. 이윽고 첫째 아이는 내게 "엄마 왜 이리 착해졌어요?"라며 되묻기 시작했고, 감정표현도 안 하고 항상 우울해하던 둘째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활짝 웃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일절 말 한마디 안 하던 둘째가 미주알고주알 학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배 아프다며 조퇴하는 일도 없어졌다.
2019년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장사를 하고 잠깐 집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하던 나에게 아이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당시 6학년이었던 둘째 아이가 2학기 학급회장에 당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8년 이상을 그림자처럼 살던 아이가, 나처럼 어떠한 일을 시도하려다가도 실패할 것 같아 아예 안 해버리던 아이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엄마! 내일 회장 선거한다는데
나도 나가볼까?
늘 내성적인 아이였던 터라 아예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별 뜻 없이 "하고 싶은 일이 있음 일단 도전해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없지 않겠어?"라고 이야기해주고 잊었다. 그런데 진짜 선거에 나갔다니! 안 할 거라 생각했다.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여태껏 아이가 해 온 것처럼 뒤에서 조용히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아이고! 전교회장 선거에도 나가야 하는구나! 큰일 났네!"
피켓 만들까?
명함 같은 거라도 돌릴래??
명함 사이즈로 출력해줄까?
선거운동 누가 해주기로 했어?
그런 거 다 필요 없단다. 자기 스스로 해보겠다며 본인은 공약으로 승부를 걸 거라고 한다. 스스로 한 번 해보겠다며 엄마는 신경 쓰지 말란다. 저녁에 다시 가게를 나오는 길, 20여분을 걸어오는 그 길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동안 이 아이를 키우면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에게 못했던 일들만 자꾸 생각났다. 못난 엄마로 살던 지난날들이 마구 생각났다.
나부터 변했어야 했구나..
내가 변하니까 아이들도 변하는구나..
밤 9시. 퇴근하고 와보니 연설문도 그럴듯하게 적어놨다. "정말 엄마 도움 없이 선거를 치러도 되겠어? 다른 친구들은 엄청 선거운동도 할 테고 예쁜 피켓들도 넘쳐날 텐데 속상하지 않겠어??"
(큰아이 5학년 때 전교 어린이부회장 선거에 나선적이 있었다. 그땐 POP 포스터와 피켓도 밤새 만들어 도와줬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그 짧은 선거기간을 위해 엄마들이 할 일들이 많았다.)
괜찮아, 엄마!
10명 중에 되는 사람은 3명이니까 다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냥 내가 해볼래!
아이에게 오롯이 다 맡기기로 했다. 정말 불량엄마지만 스스로 해보겠다는 용기에 또 한 번 감동했다. 마냥 그림자처럼 형 뒤에서 응석만 부리는 막둥이 뒤에서 조용히만 있던 아이가 어디서 이런 용기가 생겼을까. 아이에게 또 한 번 배우는 순간이다.
최선을 다 하고 와!
결과는 너로 인한 게 아니야!
그 일에 최선을 다 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선거 당일날 아침, 등교할 때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가 나에게 전해준 용기는 나로 하여금 이제 어느덧 다른 이들 앞에서 나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우리 아이와 같이 아픔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더 이상 고개 숙이며 뒤로 숨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와 같이 아픈 아이를 낳은 엄마들이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아이가 끄집어내 준 용기는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나와 같은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