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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Sep 13. 2020

ID와 비밀번호

내가 나라는 증명

늦은 밤. 안방에 있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그라미
엄마 티스토리 로그인이 안 되네


평소 같으면 벌써 잠이 드셨을 시간. 아직까지 잠들지 못하신 건 아마도 숫자 때문일 것이다. 요즘 엄마는 숫자를 보는 재미에 빠져 계신다. 얼마 전 엄마의 메일 계정으로 블로그를 하나 개설해 드리고 직접 쓰신 글들의 업로드를 도와드렸는데, 매일 방문객의 숫자를 확인하시는 재미가 쏠쏠하신 것 같았다. 잠들기 전, 오늘의 숫자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하셨으리라. 매번 자동접속으로 어플을 사용하셨는데 갑작스레 등장한 재로그인 앞에 당황하셨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스마트폰을 오래 쓰셨지만, ‘본격적으로’ 어플을 사용하신 것은 요 근래의 일이라 자주 SOS를 요청하시곤 했다. 우리 집의 공식 컴퓨터 담당인 나는 전자기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 그중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비밀 번호. 은행, 국세청을 비롯한 가족들이 가입한 여러 사이트의 비밀번호 갱신은 내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은 어찌 보면 쉽지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다. 사이트의 비밀 번호를 찾으려고 가입 당시 입력한 메일의 비밀번호부터 다시 찾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데, 시간이 꽤 들기도 한다.      


내 비밀번호도 매번 까먹어서 통신사 인증을 수도 없이 하는 입장인지라 부모님의 비밀번호를 다 기억하긴 무리였다. 아무리 대부분 통일을 한다고 해도, 어딘 10 글자고, 어딘 8 글자고, 어딘 영문+숫자, 어딘 영문+숫자+특수기호 다 보니... 당연 헷갈릴 수밖에. 엄마의 스마트폰을 들고 머리를 굴려 기억 속 비번을 몇 개 눌러봤지만 로그인이 되지 않자 결국 내방으로 돌아와 PC에서 비밀번호 찾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기껏 메일 인증을 한 뒤에 새 비밀번호로 갱신을 시도했는데... 이전 비밀번호와 같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가 뜬다. 드디어 찾았다. 새 번호로 갱신을 하러 가서 예전 비밀번호를 찾는 이런 일. 나에겐 너무 흔한 일이다.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수많은 사이트에 가입을 하며 나는 ID를 만들었고,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 위한 비밀번호를 정해왔다. 다양한 ID를 만들었지만, 그중 내가 진짜 가지고 싶었던 ID를 만들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뭘 해도 다들 이미 있다고 해서 말이지. 나는 동그라미지만 동그라미는 이미 수없이 많았다. 그냥 동그라미가 안 되니 숫자는 늘어나서 몇 번째 동그라미가 될지 정하는 것이 더 빠른 일이기도 했다.      


ID에서 나의 정체성이 사라지며 오히려 비밀번호에 내가 더 진하게 담기기도 했는데... 옛날 인터넷 초기 시절 비밀번호의 경우 주로 메시지를 담은 비밀번호로 설정을 했었다. 매번 그 메시지들을 비밀번호로 치며 사이트에 접속하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기분이 들곤 했는데, 정말 말 그대로 ‘비밀’ 번호였기 때문이었을지도.

   

어렸을 적엔 각 사이트마다 비밀번호가 모두 다르게 설정해 놓기도 했다. 그땐, 지금보다 가입한 곳이 적기도 했고 기억도 모두 선명했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가입하는 사이트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놈의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라는 붉은 글씨를 보는 게 슬슬 지긋지긋해지면서 내 비밀번호는 메시지고 뭐고 단순하게, 기억하기 좋은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렇게 설정한 것도 까먹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자 이젠 아예 브라우저에 비번을 저장해버리고 쓰고 있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나는 항상 나이다.


내가 나인 것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겠지. 그런데 가끔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메시지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만약, 내가 나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난 어떻게 될까.      




지난해, 친구의 할아버지께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둘은 참 많이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을 잃어 간다는 것. 상상만으론 그 슬픔의 깊이를 모두 알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나란 인간의 시간을 되짚어 보며 이 기억을 잃는다면 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단순한 가정만으로도 며칠을 울었다. 내 기억을 어찌 잃을 수 있을까. 기억을 잃고 살아갈 수 있을까. 기억을 잃는다면 내가, 나일 수 있을까?      


그 후 어딘가에 비밀번호를 입력 못해 접속 못하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내가 나라는 것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쑥불쑥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릴 적, 난 저명한 사람이 되는 것을 꿈꿨다. 누구나 나를 알고 나를 인정해 주는 삶. 참 멋진 인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보니 누구나 알아보는 삶보다 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 하나 갖는 것도 어려운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비밀번호가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해졌듯, 어찌 보면 내 인생도 그 옛날 어느 순간들보단 단순해지고 있다. 조금은 쳇바퀴 도는 생활 속에서 지금 시간들도 단순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들마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생에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그리고 그 소중했던 기억들엔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간에도 내가 있었다. 내가 나를 증명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까 봐 두려웠지만 한참의 생각 끝에 난 깨달았다. 언젠가 내가 나를 잃는 순간이 와도 내 생에 언제나 존재하던 그들이 있는 한 나라는 사람의 비밀번호는 안전하지 않을까. 내가 나일 수 있는 원동력인 그들이 있기에.  


나는 항상 나이다.

그리고 나의 비밀번호는 안전.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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