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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영 Apr 15. 2019

록 음악과 페미니즘, 라이엇 걸

세상을 바꾸는 자매들의 목소리


   대중문화와 예술의 영역이 페미니즘의 담론 안에 들어온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이러한 논의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외친 페미니즘 첫 번째 물결(the first wave)에 이어 여성의 해방을 주창한 2차 물결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페미니즘 논의가 이루어지던 문화적 분야는 대다수 텔레비전과 영화, 혹은 대중 소설이었다. 그 어떤 대중문화와 페미니즘 서적을 들춰봐도, 음악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중 문화론을 공부하는 페미니스트이자, 무엇보다도 음악 애호가로서 긴 시간을 보내온 나는 의문이 들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이 남성적 세계관에 종속되어있는 만큼 페미니스트들이 다뤄야 할 논지가 광범위한 건 사실이지만, 그간 논외의 대상이었던 대중음악이야 말로 남성이 전유하는 영역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재즈로부터 기원한 초창기 대중음악, 즉 로큰롤의 시작, 파생, 변화의 모든 과정은 철저히 남성에 의해 이끌어졌다. 물론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스티비 닉스(Stevie Nicks)와 같이 두각을 보인 여성 싱어들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지만, 그 수가 남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남성 중심으로 형성된 록 음악 씬에서 여성은 자연스레 남성의 언어로 재현되었다. 여성은 남성 록 스타를 쫓아다니는 그루피였고, 뮤즈이자 연인이기도 했으며, 성녀 또는 창녀에 불과했다. 특히 윤리적 결핍을 ‘악동’이라는 선망적 이미지로 포장하고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과시한 여럿 남성 밴드들의 음악에서 여성은 더욱 철저히 대상화되었다. ‘나를 반하게 한 매혹적인 여자’나 ‘날 배신한 창녀’와 같이 불온한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정체성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렇게 남성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두려움을 내딛고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멋진 여성들이 음악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록 음악 씬에서 페미니즘 물결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90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er), 애니 레녹스(Annie lennox) 등의 여성 뮤지션들이 성차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왔지만 이는 개별적 행위에 그쳤을 뿐 어떠한 집합적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 반해, 페미니즘의 슬로건을 앞세우고 여성 해방을 적극적으로 주창하는 여성 밴드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Bikini Kill


   이러한 흐름의 슈퍼 스타는 비키니 킬(Bikini Kill)로, 이들은 팝 음악에서 여성에 부여되는 평면적인 이미지를 깨부수기 위해 파격적인 스탠스를 취한다. 분노와 슬픔이 섞인 복합적인 뉘앙스, 용기, 여성 간의 연대에 대한 메시지를 음악에 솔직하게 실어낸 것이다. 내면에 꾹꾹 담아두어야 했던 불쾌한 감정과 지저분한 욕망까지도 거침없이 쏟아내며 여성의 욕구마저 억압하는 사회의 권력자들을 시원하게 비꼬아댔다. 어쩌면 음악은 목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메시지를 설파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단순히 구호를 외치기 위한 쟁가에 머물지 않았다. 패티 스미스(Patti Smith)부터 수지 앤 더 밴시스(Siouxsie & the Banshees), 소닉 유스(Sonic Youth)의 킴 고든(Kim Gordon) 등 7-80년에 뿌리내린 여성 펑크 록의 에너지를 흡수했고, 이에 창의성을 더해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거친 사운드와 비통속적인 구조를 뛰어난 감으로 조합한 음악은 남성의 얼굴을 한 사회 질서를 무너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반대 편에서는 ‘페미나치들, 뭐가 그렇게 화가 나니?’하는 조롱이 들끓었지만, 혁명의 불꽃은 언제나 비난을 감내하는 급진적인 이들로부터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던가. 지배적인 권위에의 도전이 놀랄 정도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사실이다.


Riot Grrrl


   많은 여성들의 지지와 공감을 증명하듯 비키니 킬의 행보는 결국 그들만의 리그에 멈추지 않고 하나의 동향을 형성했는데, 이렇게 탄생한 음악 조류엔 ‘Riot Grrrl’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라이엇 걸 밴드들의 인기와 함께 ‘Girl Power’, ‘Girls Rule’과 같은 Women’s Empowerment 문구가 유행했으며, 사회적 여성성에 저항하는 행위적 실천이 문화의 물결을 타고 젊은 여성들 사이에 활발히 고무되었다. 가부장제의 질서를 거부하고 젠더의 경계를 허물겠다는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커트 코베인(Kurt Cobain)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그런지 록을 완성한 코트니 러브의 밴드 홀(Hole), 비키니 킬과 같이 올림피아에서 결성되어 페미니즘 록의 최전방에 선 슬리터 키니(Sleater-Kinney) 모두 이 시기에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며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 외에도 L7, Bratmobile, Slant 6 등의 밴드들이 라이엇 걸을 이끌어 나갔다.


   물론 라이엇 걸의 한계점은 존재한다. 페미니즘의 이상이 ‘강한 여성상’의 추구에 맞춰졌다는 점이나, 메인스트림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고 언더 그라운드에서의 인기에 그쳤다는 점이다.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라이엇 걸의 인지도는 극명히 낮다. 하지만 페미니즘 록의 흐름은 잠깐의 유행에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도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 꼭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로 정체화 하지 않더라도 여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인간으로서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의 중요성이 팝 음악 전반에서 더욱 공고해졌음은 분명하다.


Lana Del Rey와 Cat Power


   험버트를 옹호하고 페미니즘을 부정했던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는 최근 과거로부터의 탈피를 외치듯 캣 파워(Cat Power)와 함께 ‘Woman’이라는 여성주의 곡을 선보였고(그들은 이 곡을 ‘페미니즘 송가’에 제한하지 말아 달라는 의견을 비쳤지만), 다음 앨범을 예고하며 발표한 싱글을 통해 한껏 건강해진 주관을 내비쳤다. 쟈넬 모네(Janelle Monae), 샤론 반 이튼(Sharon Van Etten), 그라임스(Grimes), FKA Twigs 등 높은 지지도와 뛰어난 음악성을 겸비한 모던 아티스트들은 꾸준히 소신을 밝히며 감상자로 하여금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돈독한 자매애를 느끼게 할 만큼 뜨거운 창작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비요크(Bjork), PJ 하비(PJ Harvey)와 같은 아티스트는 존재 자체만으로 여성주의의 고취에 기여하고 있다. 팝 씬 역시 비욘세(Beyonce)부터 시아(Sia),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 신예 시그리드(Sigrid)까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든든한 연대가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이들이 보편적 인간으로서 젠더라는 특정 성질에 갇히지 않고, ‘여성’이라는 시사점에서 가중되는 논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때가 와야 한다. 그 시대가 바로 모든 여성 아티스트들이 바라는 미래가 아닐까.


   6-70년대 록 씬처럼 남초 현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아직까지 한국에선 ‘여가수’나 ‘여성 보컬’ 등의 단어가 문제의식 없이 사용되고 있다. 여성 연예인이 페미니즘의 뜻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온갖 권력적인 언어의 검열로 옥죄이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애초 시장의 규모가 다르지만) 페미니즘이 언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미국의 상황과 달리, 한국은 음악에 대한 말하기, 글쓰기의 영역조차 남성적 시각에 치우쳐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녕 우리는 20년 전 미국의 발끝 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한 걸까? 아이돌 산업 위주로 돌아가는 음악 시장의 구조 상 ‘한국의 라이엇 걸’ 따위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꼭 같은 방식으로 변화의 싹을 틔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여성주의는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고, 방관으로 회피할 수 있는 가벼운 담론이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유보할 수 없는 단계에 올라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쩌면 시작의 단계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전 세계에서 페미니즘의 의미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이러한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음악과 예술뿐만이 아니다. 정치, 경제, 기울어진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서 멋진 여성들의 펑크 정신을 계승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할 때이다.


   4월 11일,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판결이 났다. 여성들의 절실한 외침에 시대는 분명히 응답하리라 굳게 믿는다. ‘자매님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김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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