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우리 아파트에서 관리규약 개정안을 만들었다. 이사 온 지 2년이 지났지만 아파트 관리규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개정안을 받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보았다. 층간소음에 관한 규정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77조에 층간소음 관리위원회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층간소음 관리위원회는 동별 대표 2인, 관리 사무소장 1인, 선거관리 위원 1인, 부녀회 또는 경로회 회원 1인 이상으로 총 5인 이내로 구성한다>고 나와 있었다. 두 달 유급휴가를 방콕하고 보내고 있을 무렵, 윗집에서 손님들을 불러 최단거리 전력질주 신동들의 묘기에 심취하던 어느 토요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살생을 피하기 위해 참을 인자를 수 없이 가슴에 새기다 결국 경비실에 연락을 했었다. 얼마 후 경비실에서 연락이 와서 윗집에서 인터폰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소음은 계속되었고, 나는 경비실에 또 연락을 했다. 경비실에서 이번에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 관리사무소 담당이란다. 관리 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토요일이지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관리사무소에서는 또 경비실 담당이란다. 그래서 층간소음 관리위원회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동 대표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 동대표가 사는 아파트 호수를 알아냈다.
동대표의 호수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두어 달이 지났다. 지난 토요일 윗집 인간들 덕분에 하루를 낭비한 후 일요일과 월요일 대부분을 누그러지지 않는 분노에 쌓여 괴로워하다가 월요일 저녁 6시 동대표가 사는 라인의 빌딩으로 가서 인터폰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산책을 가볍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동대표가 사는 아파트 라인으로 찾아갔다. 이번에는 인터폰에서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XXX동 주민인데요. XXX동 대표님 좀 만나 뵙고 싶어요."
"네!"라는 명쾌한 대답과 함께 빌딩 현관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그 집 문은 이미 열려있었고 40대 후반의 여인이 나를 맞았다.
"동 대표님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네!"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라는 표정을 지었는지, 라고 말했는지는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층간소음 때문에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녀는, "제가 좀 있다가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러는데 여기서 말씀하시겠어요?"라고 선을 그었다.
"아니면 다음에 편하신 시간에 다시 올까요?"라고 했더니, 그냥 문 앞에 선 채로 얘기를 듣겠단다.
그리고 나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대략 이십 분가량 얘기했다. 동 대표님은 상냥하게 잘 들으셨다.
"그동안 너무 힘드셨겠어요. 지금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층간소음 문제로 아파트 내에 민원이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회장님과 다른 동 대표님들과 다음에 같이 층간소음에 대해 의논해 보고 결정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연락처를 억지로 떠넘기듯 남기고 왔다. 어떤 결정이 어떻게 났는지 정말 알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대표를 만나기 전까지 사실 많이 망설였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이 싫어하는 짓을 굳이 더 열심히 하는 못된 인간들이 동네에 소문이 좀 나면 또 어떻겠냐 싶어서 결국 동 대표를 만나기로 결심을 했다. 피해자가 숨어 다니고 피해 다녀야 하든지,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는 이런 비상식적인 구도에 분노한다.
<후기>
동 대표님을 만나고 며칠 되지 않아서 우편함에 들어 있는 공문을 보았다. 층간 소음, 층간 흡연 등을 자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동 대표님께 전화가 왔다. 윗집과 면담을 하기 위해 연락을 취했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상태이고 관리 사무소장님과도 면담을 했다고 하신다. 정말 남의 일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 주시고, 전화로 진행 상황까지 알려주시니 너무 감사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보인다. '세상에 죽어라는 법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는 동대표님과 아파트 관계자분들께 감동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