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팔순 노인이 작업을 걸어왔다
서울 여행 중 있었던 일
재수와 대학 시절을 합쳐서 내가 서울에 거주한 기간은 딱 5년.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기에 나는 서울에 갈 때마다 열심히 헤맨다. 대학 이후로는 줄곧 외국에서 지방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서울을 여행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헤맨다.
서울에 연고도 없고 딱히 볼 일도 없기에 서울에 올 때마다 모교를 방문한다. 아담하고 예쁜 캠퍼스는 90년대 이후 드마라에 가끔 소개되기도 했었다. 모교 캠프스를 한 바퀴 돌고 그중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인문관 건물을 곳곳이 둘러보고 오는 것이 전부인 나의 짧은 모교 방문 동안 젊어서 화려했던 과거의 나와 재회하는 의례적인 시간이 살다 보면 가끔씩 필요할 때가 있다.
사십 대의 끝자락을 안간힘을 다해 부여잡고 있는 내가 팔순 노인의 작업에 걸린 이 기막힌 사연은 모교 방문을 마치고 다시 전철역으로 가는 도중에 생겼다. 모교로 향할 때도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돌아서서 다시 먼 길을 가야 했다. 모교 방문을 마친 이후에는 남편과 영상 통화를 하면서 교문을 나섰는데 전철역으로 좌회전해야 하는 시점을 지나친 것이다. 졸업 후 언젠가 전철역에 백화점이 생기고 이후 다른 건물들이 하나씩 들어서면서 익숙했던 길이 이제 너무 낯설다 못해서 미로로 바뀌고 말았다.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돌아서서 지상철 쪽으로 걸어갔는데 좀처럼 전철역이 보이지 않았다. 주택가는 보이는 사람 없이 너무 한산했다. 그러다가 어느 집 앞 길가에 선 한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나: "안녕하세요? 여기서 ○○○역이 어느 쪽이에요?"
노인: "저쪽으로 쭉 가다가 백화점 가는 큰길 나오면 그 길 따라가면 돼."
나: "감사합니다."
다시 남편과 영상 통화를 하면서 한참을 가다가 또 멈춰 서서 갸우뚱거렸다. 백화점으로 가는 큰 길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에 오고 계신 분께 물었다.
나: "여기서 ○○○역이 어느 쪽이에요"
노인: "이쪽으로 쭉 가면 돼. 나도 거기 가는 데 따라와."
방향치에 사람 얼굴도 잘 못 알아보는 나는 모교 방문 직전에 남미에서 온 손님들에게 작별 선물로 받은 남미 향수를 살짝 뿌린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서양란 머리핀까지 꽂고 이팔청춘의 나와 재회하고 오는 감동에 젖어 얼굴에 이상야릇한 웃음꽃 마저 만개했을 터이다. 아마도 나는 같은 노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두 번 한 듯했다. 그 노인은 가는귀가 먼 데다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을 앞장서서 가던 노인이 뒤 돌아 서서 내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노인: "어디 가?"
나: "○○에 가요."
노인: "어디 가세요?"
나: "○○에서 체육대회 한다고 친구가 불러서 가는 길이야. 나랑 손 잡고 같이 갈까?"
(그때부터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노인네의 귀여운 장난이거니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하필 나와 노인네 딱 둘 뿐이었다.)
노인: "○○에서 여기는 왜 왔어?"
나: "○○대 방문차 왔어요."
노인: "언제 왔어?"
나: "어제 왔어요. 가끔 모교 방문하러 와요."
노인: "어제 와서 어디서 잤어?"
나: "호텔에서요."
노인: "우리 집에 방 많은데, 미리 알았으면 방 하나 줬을 텐데. 우리 집에 빈 방이 세 개야."
(이때부터 점점 위험 수위가 높아진다고 느꼈다.)
나: "아, 혼자 사세요? 가족들은 안 계세요?"
노인: "다 외국 갔어."
나: "그러시구나!"
(갑자기 노인네가 측은해졌다. 나도 한 때 외국 생활한다고 가족을 떠났었는데...)
노인: "가끔씩 여자 생각이 나!"
나: "중매라도 한 번 해 보시죠?"
노인: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으면 당장 하지."
(흑! 이 노인네는 진심으로 나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설상 내가 과부라고 할지라도 아직 다 죽어 가는 노인네에게 똥값에 팔려갈 정도는 아닌 듯했다. 만약 이 노인네가 항간에서 얘기하는 그 <돈 많고 명 짧은> 남자라 할지라도 내가 <돈에 환장해서 눈이 뒤집힌 막장녀>가 아니고서야 정녕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이 아닌가!)
그때부터 나는 황급히 걷기 시작했고 곧 백화점에 이르렀다. 더 이상 그 노인네와 아슬아슬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하철 탑승 앞에서 또 무너졌다. 서울 생활을 5년간 한 나에게도 서울은 너무너무 복잡하고 분주했다. 서울역으로 가는 노선을 찾으려고 머뭇거리는 찰나 그 노인네는 또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는데 때마침 어떤 아주머니가 천사처럼 짠하고 나타나 나를 구해 주었다.
노인: "어디 가려고?"
아주머니: "어디 찾아요?"
나: "서울역 가려고요."
아주머니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엘베를 타고 지하 2층으로 가라고 말해 주시고서는 나를 직접 건물 밖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복잡한 서울과 노인의 집요한 구애에게서 해방되었다.
이 일화를 계기로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귀가 먹고 손이 떨려서 곧 쓰러질 것 같은 사람도 남자는 남자구나. 남자가 혼자 살면 여자가 그립구나. 아무리 나이 들어도 남자는 여자를 밝히는구나. 이제 나는 노인네한테 핫한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이런저런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에 도착하면 딸과 KTX역에 있는 백화점에서 만날 약속을 정하고 전날 밤 남미팀의 한국에서 마지밤을 함께 기념하느라 지친 몸을 총알 기차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