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진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트에 글을 쓰거나 책을 펼쳐 읽을 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지그시 눌러주는 크고 아름다운 문진.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이곳저곳에서 문진을 얻을 수 있었다. 메리 올리버의 시집을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문진, 시집을 포함해 책을 오만 원 이상 구입해 받은 문진, 권여선 작가의 신간 사은품 문진. 유리로 만들어진 문진들은 단단하고 묵직하며 시구나 소설 문장을 품고 있다.
문진으로 노트 한쪽을 눌러놓고 글을 쓴다. 지난주부터 컴포지션 스튜디오와 라미 만년필 브랜드가 협업하여 제품을 제공받고 4주 동안 글을 쓰며 제품을 경험하는 라이팅 클럽 멤버에 선정되었다. 이틀에 한 편씩 컴포지션 스튜디오 노트에 라미 만년필로 쓴 글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 같은 날 을유문화사에서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서평단에 뽑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4월부턴 장편소설 워크숍을 신청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합평 날짜가 정해지고 그날까지 정해진 분량을 채우기 위해 매일 200자 원고지 10에서 20매 분량의 장편소설을 꾸준히 쓰려고 노력한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쓴다. 책을 읽는다. 그 결과물을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브런치에 몇 달 글을 올리지 않는 동안 계속 쓰고 읽었다.
육아일기를 제외한 에세이와 서평과 소설을 세상에 공개했다.
육아일기로 쓰는 일기장은 차마 공개할 수가 없다.
한 해가 한 달에 한 페이지씩 열두 페이지로 구성된 한 권의 노트라면, 올해 3월 페이지는 찢어지고 구겨져 그 안에 적힌 내용을 간신히 해독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다. 새 어린이집 적응 문제, 소아재활과와 소아정신과 진단, 치료, 혼돈, 절망과 희망, 분노, 3월은 다시 읽기 어렵다. 이 페이지가 세상에 공개될 수 있을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육아일기 공개를 중단했다. 브런치 자체를 잠시 중단했다.
객관적인 사실만 말할 수 있다.
23년 5월 현대 41개월의 내 아이는 발화 수준이 20개월 미만으로 사실상 무발화 상태.
주 2회 언어치료와 주 1회 감각통합치료를 받는 중.
새 어린이집에서는 낮잠 거부로 매일 1시 하원.
나는 일 구하기를 중단하고 전업으로 돌아왔다.
언어가 영혼의 표현 수단이라면 나는 아직 내 아이의 영혼이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올해 초 상황에 대해 남편을 제외한 다른 누구와도 자세히 털어놓지 않았다. 소아정신과에서 들었던 말들, 새 어린이집과의 문제, 아이를 둘러싼 수많은 말들, 말은 날을 세워 칼이 되었고 우리는 그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칼날 위를 걷듯 3월을 보내고 나는 일 구하기를 포기했다. 한 시에 아이를 데려오고 또 치료 센터에 보내면서 출퇴근을 할 순 없었다. 일도 육아도 다 해낼 수 있다며 자신했던 1년 전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사실 지금 나도 아무것도 모른다. 아이가 내게 배고프고 슬프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이 미래에 있을지, 초등학교 공개수업 날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 뒤에 서서 동그란 뒤통수를 조마조마한 마음 없이 바라볼 미래가 가능한지, 보통의 미래가 내게도 주어진 권리인지 현재의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장편소설 워크숍을 신청했다. 한 달에 한 권 정도 서평단 활동을 신청했다. 글쓰기 클럽 활동을 신청했다. 하루 한나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원 전까지 20매의 원고를 완성하고 노트 한 페이지를 채우는 순간 만끽하는 성취감은 중독성이 있다. 성취감의 진통 작용이 말에 베여 쓰라린 고통을 진정시키고 하루를 좀 더 견딜 수 있게 한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이런 종류의 기쁨이라면 기꺼이 중독되리라.
글쓰기와 독서는 내게 크고 아름다운 문진과 같다. 작은 바람에도 창 밖 너머 깊은 숲 속으로 영영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얇고 연약한 내 삶을 지그시 눌러 고정할 묵직한 문진. 문진 하나에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 메리 올리버, 기러기
다른 문진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 권여선, 각각의 계절
나의 외로움, 나의 고통, 우리의 외로움, 우리의 고통,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올해의 이야기를 기꺼이 공개된 글로 쓸 수 있는 미래가 올 때까지, 노트 위에 눌러두는 나의 아름다운 문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