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내-존재인 내가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
비가 내린다. 비가 많이 내린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 카페를 포기하고 서재 책상 앞에 앉는다. 두꺼운 비구름이 암막커튼이 되어 하늘을 가린다. 스탠드 등을 켠다. 비는 빗줄기가 아니라 거대한 벽이 되어 있다.
거대한 벽이 지상의 모든 것을 짓누른다. 세계-내-존재, 세계가 그 안에서 존재하는 나를 짓누르는 압력에 숨을 쉴 수가 없는 무수한 날들, 세계가 나를 싫어한다는 느낌은 지옥 그 자체다.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데 이곳은 나를 거부한다.
나는 세계를 인격화하여 내 옆에 두고 바라본다. 교실에서 가장 힘이 세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학생으로 비유한다. 한국에서 그런 학생은 엄석대라는 고유명사를 가진다. 그의 말 한마디에 고립될 수 있고, 그의 손짓 한 번에 복종해야 하는 세계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모른다.
책상 앞에 펼쳐진 책은 경고한다.
-83쪽, 실존범주로서의 세계 ‘곁에 있음’이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앞에 발견되는 사물들이 나란히 함께 눈앞에 있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현존재’라고 이름하는 한 존재자가 ‘세계’라고 이름하는 다른 존재자와 함께 ‘나란히 옆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세계와 세계-내-존재인 나는 나란히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건 습관이라고, 책은 말한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실체화하는 습관. 이는 세계와 세계-내-존재를 명확히 파악하는 데 오히려 방해된다.
하지만 나는 세계와 나라는 현존재를 정확히 알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게 아니다. 세계가 나를 미워한다고 상상하면 지속적으로 닥쳐오는 불운과 실패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의 모든 것이 다 잠길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지금의 폭우가 세계의 분노라고 형상화하면 약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해한다고 공포심이 줄어드는 건 아니지만.
내 체념에 책은 바로 나를 달랜다. -84쪽, 현존재 자신 나름의 고유한 ‘공간 안에 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또한 그 나름 오직 세계-내-존재 자체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 내 자체의 근거라면 폭우가 쏟아지는 세계 안쪽 서재의 스탠드 등을 켜 놓은 책상 위가 될 것이다. 세계가 나를 미워하든, 내게 무관심하든, 나를 밀어내든, 나를 괴롭히든, 나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고 숨 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세계가 나를 부정한다며 절망하지 않는, 세계 자체를 거부하지도 않는 재해석의 공간이 필요하다.
-85쪽, 안에-있음의 이러한 방식들의 다양성은 범례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하여 제시할 수 있다 : 어떤 것에 관여하다, 어떤 것을 제작하다, 어떤 것을 경작하고 가꾸다, 어떤 것을 사용하다, 어떤 것을 포기하여 잃어버리도록 놔두다, 시도하다, 관철하다, 알아보다, 캐묻다, 고찰하다, 논의하다, 규정하다. 이러한 안에-있음의 방식들은 앞으로 더 상세하게 특정지어야 할 배려함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내 말을 무시하는 세계 옆자리에 앉아 근데 있지, 아 내가 이 말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아니 네가 듣기 싫으면 말 안 할게, 아닌가 할까? 운을 띄운다. 나는 나를 보지 않는 세계 옆에서 수다를 떤다. 아니 진짜로, 사실 내가 『존재와 시간』같은 책을 읽는다고 더 존재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삶을 더 잘 돌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잘 보낸다고 하기도 어려운 게, 나는 이 책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독서교육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인 독서법을 수행하고 있잖아, 시간낭비라고, 근데 또 나는 이렇게 내 마음대로 읽는 게 재미있거든, 내 방식대로 독서법을 시도해 보고, 너랑 이렇게 얘기도 좀 하고, 읽다가 비 그치는 거 보면서 개운해하고, 실제로 똑똑하진 않지만 내가 좀 똑똑해 보이는 것도 같고, 똑똑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면 정말로 똑똑해질 수도 있고, 그게 살아있음의 재미이겠고, 내가 나를 배려하는 방식이고, 나는 오늘 읽은 부분에서 계속 등장하는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가지고 딴생각하는 것도 좋고, 87페이지에서 ‘세계-내-존재’가 어쩌구 ‘위장과 은폐를 퇴치한다’는 저쩌구 문장도 좋고,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게 내 현존재의 방식임을 구구절절 설명한다.
세계는 책상 위에 엎드려 버린다.
듣고 있어? 너는 귀만 열어 둬, 책 읽고 말하는 건 내가 할게, 듣기만 해.
71-89페이지, 제2장 진입, 집-서재-책상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