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 등장
[존재와 시간]이 다시 침묵의 시간에 빠질 위기가 찾아왔다.
2년 전 기간제 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하이데거 대신 국어 교과서를 펼치느라 바빴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학교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대표작 [존재와 무]가 민음사에서 새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나는 [존재와 시간]보다 [존재와 무]를 먼저 읽고 싶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계 속에 아무 이유 없이 '던져졌다'는 실존주의의 명제가 언제부터 내 안에 스며들었을까? 실존주의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읽고 받았던 충격은 기억난다. 알베르 카뮈,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를 숨 가쁘게 읽고 난 내 뒤로 사라 베이크웰의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이 찾아왔고 문을 닫았다. 출구가 사라졌다. 나는 꼼짝없이 실존주의에 붙들렸다.
실존주의를 담은 책들이 내게 소리친다.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책의 목소리는 내게 명령한다. 너는 실존주의자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나라는 존재를 우선하는 비대한 자아를 가진 내게 실존주의는 맞춤형 옷과 같았다. 딱 맞는 옷을 입고 기뻐 날뛰는 내게 목소리는 이미지 하나를 보여 주었다. 카페에서 나란히 앉아 글을 쓰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커플의 모습이었다. 줄지어 새롭게 출간되는 보부아르 책의 목록과 사르트의 주저 목록을 눈앞에 들이대며 목소리는 명령했다. 이들이 쓴 책을 모조리 읽어라! 나는 기쁘게 복종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전개해 [존재와 무]를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두 권 다 읽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존재와 시간]을 읽는 시간을 잠시 멈춰두고 [존재와 무]를 먼저 읽기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존재와 무]를 읽고 싶으니까. 왜냐하면 1300페이지나 되는 사르트르의 책을 들고 다니면서 팔근육 자랑을 하고 싶으니까. 왜냐하면 같은 해 출간된 보부아르의 [초대받은 여자]도 새롭게 번역 출간되어 나란히 읽으면 좋은 독서가 될 테니까. 왜냐하면 수업 준비를 위해 펼친 수능특강 교재에서 비문학 지문으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튀어나왔으니까.
사르트르는 나라는 존재에게 타자라는 존재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나는 네가 필요하다. 책은 읽어 줄 독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독자가 책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책이 읽을 사람을 선택한다. 과거 [존재와 시간]이 드라마를 통해 나를 읽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면, 이번에는 [존재와 무]가 교재 속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와 나를 놀라게 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무'로 바뀐 자리에 밀려난 시간이 서운한 티를 있는 대로 내며 나를 걷어찬다. 존재와 시간이고 무고 다 읽을 수는 있고? 독서를 위한 절대적인 시간은 부족해졌고 나는 더 이상 없는 존재가 아니다. 일정 기간 나의 존재는 무가 아닌 유의 세계 속에 던져진다. 읽을 수는 있고? 그건 두고 봐야지, 제목부터 무겁고, 책도 무겁고, 소개글만 봐도 이해가 안 되고, 시간은 부족하고.
하지만 내 독서는 원래 이런 식이다. 책인 네가 독자인 나를 무시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사랑을 하는 쪽이 이긴다. 실존주의도 마찬가지로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홀대해도 괜찮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까 너는 받기만 해, 어차피 너는 너를 읽어 줄 내가 필요하니까. 너는 나를 필요로 하고 나는 너의 필요에 기꺼이 응한다. 일방적인 짝사랑 방식의 독서법으로 네게 다가갈 테니, 지금부터 지켜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