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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즌졍 May 26. 2019

반지를 빼고 면접을 보러 간 이유

[Essay] 다시 월급쟁이가 됩니다.

뭐 대단한 반지는 아니다. 결혼반지 약혼반지 커플링 뭐 이런 거 전혀 아니고, 그냥 런던에서 15유로쯤 주고 산 반지 하나랑 탈린에서 또 한 13유로쯤 주고 산 반지 하나이다. 화장하고 원피스 입고 스타킹 신고 핸드백 메고 시계 찬 다음에, 언제나처럼 반지를 끼려다가 멈칫했다. 아니 뭐 이 조그만 은반지들이 뭐라고. 근데 안 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허전한 손가락을 문질러댔다.


하루 종일 허전한 손가락을 문질러댔다.


술 진탕 마시고 집에 들어와 동물적인 감각으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뛰어든 그다음 날. 엉망진창인 와중에 나름의 질서가 있는 나의 책상에서 반지 2개가 보이지 않았다. 나에겐 반지가 총 4개가 있다. 그중 2개는 작년 생일날 내 돈 주고 산 만 원짜리 은반지이고, 나머지 2개는 위에 말한 런던과 탈린에서 산 은반지이다. 사라진 아이들은 런던과 탈린에서 산 아이들이었다. 얼마 하지도 않는 거, 결국 잃어버렸군 했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서울에서 산 반지들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너희가 남아있는 거니.


반지는 나의 액세서리가 아니다. 내 손가락에는 여자 손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꽤나 많은 털이 자리 잡고 있고, 토실토실하게 살도 꽤 더덕더덕 붙어있으며 짜리 몽땅하다. 그래서 그 어떤 반지를 껴도 이상했다. 사실 한국에서는 따로 주문 제작하지 않는 이상 맞는 반지 사기도 힘들다. 그러다가 노린이를 만났다. 핀란드에서. 노린이 손가락에는 참 잘 어울리는 예쁜 은반지가 항상 2개 있었다.


왜 너희가 남아있는 거니.


노린이에게 내 손가락의 짜리 몽땅함과 털과 살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린이는 자신의 손을 보여줬고, 여리여리한 노린이와 다르게 손가락들은 꽤나 다부졌다. 그리고 노린이의 반지는 놀랍게도 내 손가락에도 맞았다. 그렇게 유럽의 노점상에서 판매되고 있는 반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만 오천 원에서 이만 원 밖에 안 하는 반지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이즈가 정말 다양했다. 어디를 가도 내 손에 맞는 반지를 찾을 수 있었다. 서울과 달리.


노린이에게도 반지는 본인의 액세서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노린이는 본인이 사랑하는 도시를 계속해서 기억하기 위해 반지를 사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나는 노린이가 사랑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기억하게 해 주고, 다른 하나는 노린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런던을 기억하게 해준다고 한다. 아주 멋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샀다 반지.


사랑하는 도시를 계속해서 기억하기 위해 반지를 사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와 엄마의 친구분들이 놀러 오셔서 꽃보다 언니를 찍는 기분으로 탈린에 방문했을 때 하나. 노린이가 사랑하는 런던을 노린이와 함께 방문했을 때 하나. 물론 매번 반지를 볼 때마다 그 도시가 생각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한 3-4년 정도 매일 끼고 다니다 보니 놀랍게도 반지는 나의 액세서리가 되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반지들은 가습기 밑에서 발견되었다. 순간 밀려오는 감사한 감정에 살짝 놀랐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반지들을 꽤나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면접을 보러 갈 때는 놓고 갔다. 그냥. 순간. 갑자기. 그날 하루는 춤추고 노래 부르고 연기하고 글 쓰고 여행하는 지윤정이 아니라. 월급 버는 지윤정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랬다. 그래야 다시 월급을 위한. 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다시 월급을 위한. 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허전한 손가락을 문지르며 면접을 봤다. 6월부터 다시 월급 받는다. 이젠 다시 매일 열심히 반지 낀 채로 월급 벌어야지. 춤추고 노래 부르고 연기하고 글 쓰고 여행하는 지윤정이 내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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