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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22. 2020

프랑스의 알제리 대학살, 침묵하는 프랑스에게 묻는다


1830년 프랑스는 샤를 10세의 알제리 침략을 시작으로 1853년 뉴칼레도니아 강탈과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섬들을 차지하며 ‘제2차 식민제국’ 시대를 연다.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1858년)과 지배도 우리나라를 공격했던 병인양요(1866년)도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중에 프랑스가 특별히 공을 들인 곳이 있었다. 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이었던 알제리였다.
 
< 알제리 132년 지배 : 독립을 원한 알제리인들 200만명을 무참히 학살한 프랑스 >
 
 프랑스는 영구지배 목적으로 알제리의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알제리는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많은 군수물자 공장들이 들어섰고 식민지 수호를 위해 창설한 외인부대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적극적인 이주 정책으로 식민 통치 말기에는 ‘피에르-누와(Pied-Noir)’라 불리는 유럽계 이주민들이 알제리 국민의 1/10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착민들과 이주민들 간의 차별이 모든 면에서 심하게 자행되어 절대다수의 알제리인들은 가난에 시달렸으며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 동안 알제리인들의 90%는 문맹이었다.

 알제리인들의 비옥한 해안가 토지는 몰수되어 유럽계 이민자들에게 매각되었고, 토지를 빼앗긴 알제리인들은 내륙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하며 높은 세금을 내야했다. 기본 인프라는 피에르 누와가 모여 살던 해안가 도시 위주로만 설치되었으며 그들에게만 평등 교육이 제공되었고 알제리인들은 교육에서 배제되었다. 산업혁명 후 알제리는 프랑스의 원료 공급지이자 완제품을 소비하는 시장으로 기능했으며,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이 자본가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알제리인들은 '열등한 민족'이라며 프랑스인들에게 경멸당하였다.
 

1857년 Randon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알제리에 도착한 모습. 프랑스계 귀족들의 축제가 열리는 듯 하다
1830년 프랑스가 처음 알제리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좌)은, 115년 후 그대로 재현되었다(우) 1945년 5월 8일 세티프 학살 장면. 영화 <알제리 전쟁> 중
억압된 자유를 위해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청년들도 여성들도 아이들도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치는 알제리인들


 1차 대전에서 28만 명의 알제리 청년들이 프랑스를 위해 징집되었고 2차 대전 역시 프랑스를 위해 싸웠지만, 그들이 고국에 돌아와 목격한 건 독립을 원하는 동포들이 살해당하고 고문당하는 모습이었다. 1954년 참전자들을 중심으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이 결성되는데, 거기에는 ‘세티프(Setif) 학살’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알제리 대학살 참극이 있었다.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된 날인 1945년 5월 8일이었다.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그날 수많은 알제리인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다. 프랑스의 무력진압이 시작되었고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던 12살의 알제리 소년이 프랑스군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분노한 시위대와 프랑스군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프랑스는 세티프에 계염령을 선포하고 정규군과 경찰, 식민지 부대와 외인부대, 포로들까지 출격시켜 알제리의 40개 마을을 폭격하는 대학살을 벌인다. 알제리 독립파 진압 명목이라는 수개월간의 학살로 4만 5천여 명의 알제리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그 후에도 프랑스는 알제리를 계속 기만하였고 알제리인들은 1954년 11월 1일 무장봉기를 하게 된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NATO의 정예 사단까지 투입시켜 순양함의 함포사격과 폭격기 공세로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한다. 프랑스군의 잔인한 고문과 강간은 전쟁내내 극악하게 행해졌다. 알제리인들은 산채로 불태워졌고, 여성들은 발가벗겨진 채로 끌려다니며 강간당했다. 프랑스군들은 알제리인들의 잘린 목을 들고 웃었다. 그러던 중 1961년 ‘파리 학살’이 일어난다.


1945년 5월 8일, 독립을 열망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알제리인들(좌) 며칠 후 케라타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프랑스 장교들(우) 4600명 중 3명만 남고 학살당했다
1차대전, 프랑스를 위해 싸운 '식민지 군대' 알제리 청년들(좌) 프랑스가 해방된 날, 알제리 세티프에서 프랑스가 벌인 일(우)
1차대전과 2차대전 아프리카 청년대상 프랑스 징병 광고 "제국의 수호를 위해 참전하라!"(좌) 파리 생 미셸 다리 근처에 걸려있는 '파리 학살' 추모 동판(우)


 전쟁이 절정에 이른 그해, 프랑스 거주 알제리인들은 학살에 항의하며 경찰을 공격했고 경찰관 장례식에서 파리 경찰청장은 명령했다. "프랑스인 한 명의 목숨을 10배로 갚아줘라. 책임은 내가 진다. 적들을 박살내라" 그는 유태인 학살 전범 ‘모리스 파퐁’이었다. 10월 17일 알제리인들 3천여 명이 파리에 모여 평화시위를 하였고, 파리 경찰들은 즉시 총격과 몽둥이와 세느강 수장으로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다. <파리의 투쟁>을 쓴 역사학자 ‘장뤽 에노디’는 이틀간 60여 명이 세느강에 던져졌고 200여 명이 살해됐다고 말했다.
 
 체포된 1만 2천 명이 당한 고문과 모욕은 극히 폭력적이었다. 프랑스 경찰은 ‘3명 사망’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경찰은 없었고 1990년대까지도 사건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그러나 후에 파퐁의 재판에 나온 에노디가 ‘파리 학살은 진정한 인간 사냥이었다’고 증언함으로써 2001년 파리 생-미셸 다리에 학살을 기리는 동판이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시라크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희생자 가족은 소송을 걸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반인도 범죄’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만 해당된다는 이유에서였다. 2000년 프랑스 정부는 관련 자료 열람을 금지했다.
 
 알제리 전쟁의 프랑스 정보장교였던 ‘오사레스’는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고문은 일반화된 것이었으며 능률적이고 익숙한 것이었다" "고문은 질서유지와 방어를 위한 군사적 정당행위였다" "상부의 묵인과 지시 아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의 고백으로 프랑스는 ‘치안 유지 작전’이라 주장하던 알제리 전쟁을 처음으로 ‘전쟁’으로 인정하였다. 알제리 독립 후 37년이 지난 후였다.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학살 당일 알제리 시위대 모습.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나오는 등 철저하게 맨손으로 '평화 시위'를 했다
파리 학살이 자행된 생 미셸 다리 "여기, 우리는 알제리인들을 익사시켰다"고 적혀있다. 2011년 개봉된 다큐영화 장면(우)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샤를 드골'(좌)


오사레스의 전범행위는 '벌금형'으로 종료되었다. 중요한 건, 파퐁과 오사레스는 모두 국가 공직자로서 ‘공직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최고 권력자는 드골이었다. 알제리 전쟁은 드골 정권에서 진행되었고 종료되었다. 그렇기에 '프랑스 영웅 샤를드골'은 알제리에서는 '히틀러'와 같은 이름이다.


 프랑스 잔혹행위의 정점은 프랑스군의 성범죄에 있었다. 전쟁 내내 자행된 프랑스군의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강간은, ‘알제리인은 사람이 아니고 알제리 여성은 개와 동급’이라는 프랑스군의 인종차별적 인식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졌다고 한다. 작전에 들어가기 전 상사로부터 ‘강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프랑스 참전군인의 고백도 있었다.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의 여성들 90%가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어린 소녀들이 당연히 포함된다.

 
 그 모든 끔찍함이 지난 후, 8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1962년 알제리는 독립한다. 그러나 전쟁 동안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저지른 만행은 일본이나 ISIS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잔악한 전쟁범죄였으며, 200만 민간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80만 병력과 5조 프랑의 군사비를 투입한 프랑스의 식민지 집착이 부른 재앙이었다. 프랑스의 탐욕은 식민지 영토와 원주민들의 삶과 그들 역사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 장면만으로도, 알제리 청년들의 뜨거운 독립 투쟁 의지가 느껴진다. 영화 <알제리 전쟁> 장면 중
알제리에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고, 고문과 강간이 횡행할 때, 청년과 소년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치며 죽어갈 때, 프랑스 본토는 '식민지 박람회'를 열어 이국문화를 즐겼다


 "알제리 인구가 1830년 400만 명에서 1847 년 210만 명으로 50 % 감소되고, 70 년 후인 1906 년에 다시 400만 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학살이라고 부릅니다" Hamani 박사는 말했다. 그것은 대규모 처형, 전체 민족의 몰살, 광범위하고 공식적인 육체적 고문관행, 토지 몰수 같은 모든 법적 차별을 포함한다. 알제리 국립 기록원장은 진상 규명에 비관적이다. "식민지 현상이 두 개의 반대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해방주의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민족주의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한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시작된 법치의 세 가지 기둥 중 하나인 '정의'는 식민 지배의 도구가 되었고, 식민 억압의 수단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한 1830년 프랑스에서는 시민의 권리를 쟁취한 ‘7월 혁명’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 후에는 나폴레옹의 무력 침탈과 학살이 있었다. 이처럼 그들이 외치는 자유와 인권에 ‘프랑스 영토 밖의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알제리 대통령은 말했다. "프랑스는 알제리 국민을 잔인하게 침범했으며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끔찍한 범죄는 식민지 ‘문명화 임무의 허위’를 보여줍니다" 2020년 그는 다시 한번 프랑스의 ‘공식 사과’를 요청했다. 프랑스는 여전히 국가 차원에서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1945년 5월 8일, 파리 개선문에서 승리를 기뻐하고 있는 프랑스인들. 같은 날 알제리에서 프랑스는 수만명을 학살했다(아래)
1945년 5월 8일 '세티프 학살' 알제리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뒤, 희생자들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 프랑스 군인(좌) 프랑스의 '정의의 여신'(우) 프랑스의 정의는 무엇인가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되자 한 일은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식민지인들을 학살한 것이었다. ‘과거 청산을 확실히 했다’는 프랑스의 자부심은, 자신들의 식민지 가학 행위 앞에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그러한 개연성 없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한 ‘선택적 청산’이 프랑스가 말하는 정의인가. 프랑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프랑스의 이슬람 혐오 실태


* 참고 자료 : 알제리 학살 자료 http://bitly.kr/RezTzzm39, http://bitly.kr/1B7MYckbI, http://asq.kr/k51KOrLS1FyQg <식민지 법이 영토에 미치는 영향> Hamani "알제리 식민화는 학살이었다" 프랑스 과학저널 http://asq.kr/cBTmmd51VVmGc,(한국어 번역 http://asq.kr/9UnXmx58KLU9), "사냥이 시작되었다" 알제리 시민들을 바라보는 프랑스군 http://asq.kr/RiblZucjkZL9n, 알제리에 프랑스는 독일처럼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http://asq.kr/vaWQFXJHd6Pxj, 프랑스는 과거 청산 모범국? http://asq.kr/Lfil4Jgf27qps, 터키 "우리는 프랑스가 과거에 한 일을 알고 있다" http://asq.kr/tch7aSVD9wvWg, 알제리 전쟁 프랑스군 집단강간 http://bitly.kr/X7d9FyCSUw, 알제리 대통령 "프랑스 정부, 공식 사과해야" http://bitly.kr/8aTj9RrtTw9, 프랑스령 알제리, 위키피디아 http://asq.kr/e8hkq4Hh3NXcu, ‘파리학살’ 영문 위키피디아 http://asq.kr/FcJBjbAzMbDNs, ‘파리학살’ 칼럼 http://asq.kr/ujh1yWXxUGVT, '파리학살' 영상 http://asq.kr/zcnK2XfqpONd, 프랑스의 국가테러도 중단돼야 http://asq.kr/D3HY1ZjYbJOgb, 모리스 파퐁 영문 위키피디아 http://asq.kr/xD8yCUzwXvkCI, 알제리 전쟁 고문기술자 '오사레스' 고백  http://asq.kr/Xz5Epw9jCZtU, '벌금형'으로 마무리된 오사레스 http://asq.kr/vP0kPSlYHGXWz, '파리학살' 사진 출처 http://asq.kr/PpVFcxjdtH5d, 1차대전 '식민지 군대' 알제리인 사진 http://asq.kr/ZEi0BR5znva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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