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안녕하세요.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새 5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2013년 가을 무작정 융 공부를 꼭 해야겠다며, 제가 사는 프랑스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편지로 여쭈었지요. 원장님께서는 바로 답을 주시며 ''신기하다''고 하셨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게 <길> 지 우송까지 바로 해주셨고요. 5년이 지난 작년 10월 또 <길> 지를 받았습니다.
36호 <길> 지를 받은 날.. 많이 뭉클했답니다. 얼굴도 모르고 연락처도 모르는 이국 만리의 사람에게, 이렇게 한결같이.. 5년 전의 약속을 지켜주시는 걸까. 하고요.
나는 이제 고향의 인연들마저 다 정리해가는 중인데, 거기서도 여기서도 이제 이방인에 익숙한 고독 속에 있을 뿐인데... 융의 메시지들은 어떤 인연이기에 이렇게 내 손을 끝까지 잡고 있는 걸까. 하고요.
마음이 많이 헝클어져있던 상태 속에 받은 <길> 지는 제게, '어디서 또 헤매더라도 자신의 길을 찾길 바란다'는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안에 융의 숨결이 깊게 박혀있었음을 다시 일깨워주셔서요.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요.
어쩌면 융은 그런 나를,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5년 동안 다른 곳에서 많이 헤매었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음도 고백합니다.
불교 공부에 깊이 빠져 또 다른 시공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진짜 진리는 인간이 만든 신념과 가치 따위로 발견하거나 득할 수 없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치고 홀로 다시 앉았습니다.
주류 학문으로는 진짜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늘 어리석게도 원형을 훼손한 채 자신들 멋대로 변형시켜놓은 것을 진리라며 우기고 강요하니까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의 컴플렉스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봅니다.
길은, 길을 찾아 나서는 자에게 발견될 뿐이니까요.
진리는 도서관이나 상아탑, 예배당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오로지 명료한 정신 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때론 도서관의 지식과 상아탑의 권위와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의 머릿속을 맴돌던 이 말 <자비는 정의를 이긴다> 원장님께서 숙제처럼 여겨졌다는 이 말을 보는 순간 지금의 내게, 정확히 필요한 화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충분히 몸 값을 치르지 못한 채로 과거에 집어삼켜지며' 그 대극 속에 매몰되어 가고 있었으니까요...
저 말을 곰곰이 되새기는 동안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몇 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꾸어온 꿈의 의미가 알아졌다는 겁니다.
3년 전 집중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예비된 꿈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모두 정확하게 '한쌍'의 형태였다는 것의 의미를 놓쳤었습니다. 꿈 모두가, 하나는 남성적인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여성적인 형태로 확실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지녔었다는 것을요.
얼마 전 다시 그 꿈의 연장선인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대극을 가리키는 꿈이었다는 것을요. 정확히는 '대극의 통합'을 상징하는 '융합의 고통'을 예견한 꿈이었다는 것을요. "질서와 혼돈이 만나면 신성한 아이가 태어난다" 융의 이 말은 바로 나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것을요.
원장님은 지금, 무엇을 찾아 그곳에 계시나요?
저는 오직 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존재에 대한 이해, 정신의 자유를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융과 대화하며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길로 가는 길은 제게 '커다란 고통'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앞이 너무 캄캄하여 가슴이 미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극의 융합이라는 고통 속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이 외롭지만 귀하게 다가옵니다.....
2019년 1월, 한국융연구원 원장님께 드린 편지
* <길> : 한국융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정기 간행물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 Carl Jung
'운명'이라 불린 시간들을 지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를 비우고 또 비우며 그저 바라본다.
이 편지가 떠올랐다. 내가 언제나 당도하고 싶었던 곳. 돌아가고 싶었던 집. 자유가 된 자리.
가슴 시리도록 목이 메이도록 가슴에 다시 새긴다. 내가, 지구 반대편 이 먼 곳에까지 와, 외로운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 이유. 그 한 점을 향한 것임을.
그것이, 어떤 상아탑적 이력도 화려한 경력도 밀어줄 연줄도 없는. 그저 잡초처럼 생겨나 잡초처럼 살아가는 한 생명의 이유인 것이라고.
그것 하나로 고요하고 고요한 숨을 쉰다고. 그것이 내 최고의 경건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