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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Mar 22. 2024

총선, '좌파=정의'라는 사이비

국민은 개 돼지라며 웃고 있는 저들을 보라


총선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소위 '개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미래가 위태로워 보인다. 이번 선거는 한국이 미래로 나아가느냐 전체주의로 후퇴하느냐를 결정하기에. '진보'라는 그럴싸한 간판을 달고 '정의'를 독점한 전체주의 망령이 너무 많은 대중들을 삼켜버렸기에. 

'선동'과 '선전'에 잠식당한 40대 50대 그대들에게, 깨어있고자 하는 많은 당신들이 실은 그들의 희생양이 되어있음을 알리고자 나는 이 글을 쓴다.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이며 위험천만한 전쟁놀이. 정치판이라는 후진 생태계와 그 안에서 거들먹거리는 면면들의 치킨게임. 국민의 대표라는 뻔뻔한 가면을 쓰고 공 뺏기 놀이를 하는 그들에게 우리의 삶과 미래가 달려있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그 중에 가장 올바르고 상식적인 대표를. 하지만 지금 당신의 선택기준은 무엇인가. 빨간색만 보면 기겁을 하는 '적대감'이 모든 걸 결정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 얘기는 금기의 주제고 더더욱 노골적인 언급은 많은 적을 양산하는 거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해주고 싶다. 내가 알게된 것들을. 한국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가 사랑하는 한국과 그 땅을 딛고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소중한 한국의 미래 세대들을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땀 흘리는 모두를 위하여. 참고로 나는 과거에 '찐 좌파 옹호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들만이 정의라고 믿었기에. 하지만 한국을 떠나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우리 모두가 얼마나 깊이 '새로운 미신'에 물들어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좌파는 정의고 우파는 악마라는 이분법. 그 비상식적인 미신 말이다.

나는 모두가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심'해보기를 원한다. 지금 당신을 지배하는 판단의 근거에 대해.

왜 파란색에는 '신뢰'를 느끼고 왜 빨간색만 보면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지. 왜 파란색에는 '긍정'의 감정을 느끼고 왜 빨간색만 보면 혈압이 오르는지. 왜 파란색만 '정의'고 빨간색은 그 반대라고 믿는지. 이 구도로 보면 다음이 성립된다. "좌파는 깨끗하고 정의롭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우파에게는 늘 격한 감정이 동반된다. "우파놈들는 나쁜놈들이고 재수가 없다" 한쪽에만 과하게 감정이 실려있다. 왜 그럴까.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믿음이 심어진 것. 그리하여 상식적인 판단은 이미 필요없게 된 것. 빨간색은 '나의 적'이기에 무조건 제끼고 보는 것. 혐오감을 부추기는 이간질 전술. 완벽한 이분법 프레임이다.

파란색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이들'이기에 '선'이고 '정의'지만, 빨간색은 '단물 빨아먹던 부르주아들'이기에 '악'이고 '부도덕'이라 믿는 것. 파란색과 녹색은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한 이들'이기에 '선'이고 '인권'이지만 빨간색은 '노동자를 착취한 계급'이기에 '악'이고 '부패'라 믿는 것. 노동과 인권을 앞세운 무대의 주인공들만 정의라는 갑옷이 입혀지는 구도. 운동권의 스타들만이 신격화되는 구도. 이 낡은 프로파간다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정의와 인권을 외치는 그들'에게는 언제나 '악마화된 선명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학생 운동의 적은 '악마같은 정부'고 노동 운동의 적은 '악마같은 고용주'다. 그들의 타겟은 언제나 정확한 목표물이 있다. 바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자신들 위에 있는 자들. 그 구도는 '있는 자들=힘 있는 자들=악' '없는 자들=힘 없는 자들=선' 이라는 선명한 구도를 드러낸다. 코뮤니스트, 맑시즘, 공산주의 철학이다. 대다수의 힘 없고 선한 시민들은 '분노의 표적'이 필요하다. 그때 누군가가 나서서 크게 외친다. "부자들 때문에, 기득권 때문에, 대기업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비참하고 불행합니다! 그들을 타도해야만 합니다!" 그들에게 '가진 자들'은 가장 쉬운 '투사 대상'이 된다. "내가 이렇게 비참하고 불행한 건 모두 다 너희 탓이야!" 그때부터 대중들은 자신의 모든 내면의 분노를 한 곳을 향해 퍼붓는다. 서슬퍼런 분노의 향연. 마녀사냥의 시작이다.

그리고 '우연처럼' 사고가 터지고 노동자가 분신하고 죽는다. 그것은 도화선이 되어 순식간에 분노의 스위치를 켜게 만든다. 너도 나도 이때다 싶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의 모든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붓는다. 그리하여 상대는 '악마가 되어야만 한다'. 좌파와 극좌파의, 반드시 '적'을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독기어린' 공격성은 거기로부터 온다. 그들에게 중요한건 정의가 아니라, 자신 내면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빨간색을 싸잡아 악마를 바라보듯 하는 그들의 표독스런 눈빛은 자신 안의 분노에 삼켜져버린 '분노체'를 보는 듯하다. 특히 몇 년 사이 눈빛이 눈에 띄게 변한 사람이 있다. 여전히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작가이자 노무현의 분신이었던 좌파의 빅스타, 그 분의 눈빛을 보라.

'독기'만 남아있는 눈빛. 분노가 갈 곳을 잃어 스스로를 삼켜버린 눈빛. 그것은 절대로 자비와 사랑으로 인권과 자유를 실천하고 있는 자의 눈빛이 아니다. 극좌 정당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라. 위안부를 방패삼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라. 해산당한 정당의 수장의 눈빛을 보라. 극단적인 자기 혐오만 남아있는 살기어린 눈빛. 그리하여 자신 내면의 분노를 풀기 위하여 '반드시 적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자유도 인권도 정의도 아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분노'다. 자신 안의 깊은 분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 운동'이라는 외부로 에너지를 돌려 가면놀이를 하는 것이다.

그 놀이를 하는 동안은 자신이 '가치롭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놀이를 하는 동안은 남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그 놀이를 잘만 하면 '권력과 돈'이라는 달콤함도 챙길 수 있다. 무엇보다 민중들에게 '숭배' 받을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이 아무리 가난해도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가릴 수 있다. 그것은 한국 좌파들이 떠받드는 프랑스 좌파의 뿌리, 프랑스 혁명의 진실과 연결되어 있다. 위대하다고 철썩같이 믿는 프랑스 혁명'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광기의 학살극이었는지에 대한 진실 말이다. 이 성역과도 같은 진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말이 지닌 카타르시스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과서에 실린 역사가, 식민사관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진짜 진실된 역사' 일 수 없듯 유럽 역사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역사가, 프랑스 제국주의 식민사관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자유와 인권'을 독점하며 마치 그것이 프랑스로부터 온 것처럼 인식되게 했듯, 프랑스 혁명은 '민중의 투쟁'이라는 '감성 드라마'를 섞어 '민초들의 승리'라는 카타르시스로 포장된 극단적인 학살극이었다. 혁명을 주도한 자들은 민초들이 아닌 제3세력인 부르주아들이었으며 그들이 민초들을 부추기고 앞세워 자신의 적(제1권력인 성직자들)을 '함께 무너뜨려줄 우군들'을 선동하는데 성공한 집단 광기 학살극.


프랑스 혁명이 탄생시킨 전쟁을 Dan Sanchez는 이렇게 말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민족주의는 군주제 전쟁의 '부분 약탈'에 '대중의 접근'을 만들어 '사람들 무리가 적의 무리를 함께 약탈하도록' 만들었다. 합법적 약탈에 '인민을 공개 초청'함으로써 폭력의 정당화를 이룬 것이다. 이는 '왕의 전쟁'이 '민족주의 전쟁'으로 대체된 것으로 진보가 아닌 야만으로의 회귀다. '왕과 성직자'가 '인민'이라는 최고 사령관으로 대체되며 '자유에 대한 망상'을 유혹하기에 훨씬 더 강력하고 위험하다. 광신적 헌신을 불러오는 똑같은 '미신'이기 때문이다"


이 ‘미신’이야말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인류를 파괴한 ‘전체주의’ 원리이다. 혁명의 희생자 수가 그것을 증명한다. 프랑스 혁명 22년간 폭동과 전쟁으로 200만 명의 프랑스인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희생은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프랑스혁명에서 탄생한 프랑스 정신 ‘자유, 평등, 박애’의 최초 문구는 <자유, 평등, 박애 아니면 죽음>이었다. 자신들을 따르지 않을 시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언. 혁명 초기 이 구호를 쓰다 나중에 ‘죽음’을 삭제했다. 프랑스 혁명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표식이다. 프랑스 혁명의 ‘혁명 주도 세력'인 삼부회 제3신분 출신들은 13%만이 소상공인이었고, 변호사, 공증인, 판사, 검사 같은 법률가가 25%, 지방관리, 사법관리 관료들이 43%였다. 이들의 재산 형태는 귀족과 마찬가지로 토지재산 같은 ‘소유자적 부’였다. 부르주아는 귀족과 같은 특권을 누리고 같은 가치를 소유하던 ‘동질적인 집단’이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히틀러가 루소 사상에서 나왔다" 하였다. 제이컵 텔먼은 루소를 "구세주의적 민주주의 원류로 전체주의 사상의 기원이 되었다"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재앙으로 끝난 프랑스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고 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쓴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혁명은 온갖 종류의 죄악과 어리석은 짓이 뒤범벅 된 쓰레기 잡탕들의 광기" 라며 맹비난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민의회 의원들 면모는 주식과 채권 브로커들로 평판이 매우 낮은 자들'이었고 그런 자들이 주도한 프랑스 혁명은 "이성에 대한 맹신으로 폭력과 파괴, 살육과 전쟁, 군사독재자를 출현시킬 것"이라 예측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유주의 개념을 탄생시킨 부르주아들은 '근대 자본가들'이었다. 그들이 말한 자유와 평등처럼 세상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내걸고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결국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인 자유와 평등으로 모두는 '자본에 종속' 되었다. 자본가들이던 제3계층이 필사적으로 혁명을 밀어붙이고,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혁명을 전파해야 했던 이유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반면에 혁명으로 시민들이 얻은 건 징병과 종속, 전쟁과 죽음 그리고 자본이라는 ‘새로운 주인’이었다.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을까.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자유의 왜곡된 개념'을 1790년 에드먼드 버크는 이미 예측하였다.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의 무능력은, '자유'라는 ‘모든 것을 속죄시키는 이름’을 사용해 덮어질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오늘날의 한국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좌파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파렴치함은, '정의'라는 '모든 것을 속죄시키는 이름'을 사용해 덮어지고 있다"


그것이 작금의 한국의 위태로움이며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중대한 선택을 위한 판단 기준은 상식이 되어야 맞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기준은 어떤가. 우파 대통령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대감' 가진 당신의 감정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는 최소한 아내를 위해 계란말이를 만들고 요리를 하는 가정적이고 따뜻한 남편이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가족을 향해 하지도 않았고 전과가 있지도 않다. 중대 범죄 혐의로 재판장을 들락거린 적도 없으며 여기저기서 검은 돈을 받지도 않았다.

  사람 노무현만 순수하다.  외의 모든 좌파들은 순수하지 않다. 노무현을 팔아먹는 사람들이다. 빨간색 그들이 노무현을 죽인게 아니다. 잘못된 신화에서 이제 나올 때가 되었다. 빨간색은 그분의 죽음으로 가장  손해를  세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반드시 '' 무너뜨려야만 이익을 얻는 세력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가장  이익을 얻은 자는 민중을 부추기고 열매를 독점한 부르주아들이었다.  분의 죽음으로 가장  이익을 얻은 자와  열매를 독점한 자는 누구인가. 문제는, 현재의 한국 좌파는 노무현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노무현을 능욕했던 자들이 큰소리치는 곳이다. 불온한 중국 세력과 결탁한 자들이 있는 곳은 노무현이 바라던 곳이 아니다.  

우파와 빨간색 정당은 당신들의 '' 아니다.  감정에서 분리되어야 올바른 선택을   있다.

정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온갖 암투와 살인과 전쟁까지 불사하며 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권력'이지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이 아니다. 그들이 핏대 높여 외치는 것은 '실체가 없는 분노'이지 민중들을 위한 정의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악마와 싸우는 구세주가 아니다. 자신들 힘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거짓말을  먹듯 하고 민중의 감정을 교란시키고  돼지 잡듯 잡아 죽이고 전쟁을 일으켜 학살할  있는 자들이 정치인들이다.  세계는 정의와 자유를 목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국민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국민들 위에 군림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대중은  돼지"라는 말의 출처가, 종북 좌파 프로파간다에 맥없이 무너지고 쫒기고 욕먹고 살아온 빨간색 세력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국민들을 바보로 상정해놓고 출발하는 것이 정치게임이다. 그것은 우파 좌파가 나뉘어있지 않다. 우파 좌파라는 이분법은 '그들의 게임' 즐기는 '관중들을 위한 장치' 뿐이며 게임의 룰일 뿐이다. 그들에게 우롱당하는  국민들이지 그들은 거기에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거기에 감정이입하는 사람은 '대중들' 뿐이다. 그럼  말은 누구의 것이기도 할까.

진보의 탈을 쓰고 정의를 독점한 세력. 노무현의 가치를 독점한 세력. 자유와 인권을 독점한 세력. 약자 코스프레로 서민인척 하는 세력.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온갖 탐욕과 방탕을 일삼는 세력. 자코뱅의 광기와 폭력이  뿌리인  세력. 그런 프랑스 좌파를 신봉하고 모방하는 세력. 혼자만 고고한척 깨끗한척 하는 세력. 빨간색을 향한 원색적인 적대감을 부추기는 세력. 적이 있어야만 존재할  있는 세력. 그들은 오늘도 당신을 향해 미소 짓는다.

 "Thank You"





필자가 맹추격한 프랑스 혁명의 추악한 진실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혁명기간 자행한

참혹한 '양민 학살'


히틀러의 영감의 원천

프랑스 혁명의 상속자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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