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인간은 누구나 불가침의 천부인권을 가지며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권 선언 그리고 그것을 탄생시킨 혁명. 이 원대한 정신 앞에 세상은 감동했고 모두는 그 가치를 닮고자 했다. ‘프랑스’는 인간의 가장 고결한 정신을 탄생시킨 이름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은 그러한 프랑스를 있게 한 존엄하고 아름다운 상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망각한다. 우리는 자주 한쪽에 치우쳐 있는 정보만을 접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인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말이다.
프랑스 혁명 전 1788년은 민중들에게 매우 힘든 한 해였다. 흉작과 혹한으로 기아가 만연했고 물가폭등과 치솟는 실업률로 사회는 불안했다. 봉건 기득권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농민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제3계층에게 그들의 이상을 투영했다. 마침내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그들은 함께 왕정을 무너뜨렸고,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자유와 평등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민중들에게 돌아온 건 ‘자유와 평등’이 아닌 ‘징병과 종속’이었다. 혁명 정부가 ‘혁명을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22년간 끊임없이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자들은 ‘국가는 곧 나’라는 ‘국가주의적 주권론’을 설파하였고, 개인의 권리를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유를 위해 국가에 헌신하고 국가 영광을 위해 군사력 강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 개념은 부르주아 계층의 인식이었을 뿐 대부분의 농민들은 관심이 없었다. 1790년 프랑스 인구 2500만 명 중 불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인구는 고작 300만 명이었으며 프랑스는 '다언어' 사회였다. 이처럼 공통 기원의 역사적 정체성 없이 ‘자발적인 민족주의 형성’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징집과 공출을 거부했고 탈영하였다. 국가와의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 전 삼부회 소집을 위해 정부가 받은 ‘청원서’를 보면 농민들은 ‘제3신분이 민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농민들에게 민족의 중심은 여전히 왕이었으며 ‘왕과 민족의 분리’에 찬성하지 않았다.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며 '개인의 자유'와 결부시킨 것은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세력이었다.
혁명 당시 봉건적 의무가 다른 지역보다 낮았던 방데는 구체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카톨릭 사제와 농민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기에 협력적으로 잘 지냈다. 그런데 사제들을 ‘반혁명주의자’라며 탄압하고 교회를 폐쇄하고,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세금이 인상되고 식비가 급증하였다. 교회 재산은 마을 공동자산이고 사제는 공동체 일원이었기에 농민들은 반발하였다.1793년 왕이 처형되자 농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나아가 징병제와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지며 정부군은 농민들 식량을 압류했고 온 가족이 전쟁 준비를 해야 했다. 자신들의 말과 식량이 군대를 위해 징발되고 자식들이 전쟁에 징집되는 것에 농민들은 반대했다.
‘농노 의무’가 폐지되자 ‘국가 노역’으로 대체된 것이다. 농민들에게 그것은 똑같이 억압된 삶이었다. 혁명이 끝나자 민중들은, 혁명을 이끈 세력에 의해 ‘자유를 박탈’ 당한 것이다.
마을 공동소유였던 교회 재산이 몰수되어 부르주아들에게 넘어가자, 농민들은 혁명에 대한 박탈감과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정적으로 부르주아들인 지방 하급 관리들이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자 농민들은 분개했다.
1793년 3월 방데 지방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국가적 획일화’로 촌락 공동체를 해체하고 주민들 삶을 억압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농민 봉기를 ‘반혁명’이라고 규정했다. 농민들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에 넘어가 숭고한 혁명 정신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비무장 민간 전투원 6만 명을 상대로 11만 5천 명의 무장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군대는 여성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함께 죽였다.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였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작동한 것이다.
아이는 말로 짓밟고 아기는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남녀는 묶어 수장시키고 임산부는 포도 압착기로 살해했다. 정부가 '지옥종대'라는 군대를 보내며 지시한 ‘절멸 작전’ 때문이었다. 당시 진압군 사령관이던 François-Joseph Westermann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국민공회 명령에 따라 방데 아이들은 우리 군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여자들은 남김없이 죽여버렸기에 어떠한 반군도 낳을 수 없습니다.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이 모두 절멸시켰기에 더 이상 반란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도적떼들은 항복을 애걸했지만 우리는 주저 없이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자비는 혁명의 정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796년 정부군 사령관 보고서에는 방데 주민 60만 명을 절멸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희생자수는 없으나 30만에서 45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방데 인구는 80만 명이 못되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793년 11월부터 3개월간 낭트와 앙제에서는 또 다른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공화국식 결혼’이라는 이름의 처형이었다. 낭트의 자코뱅 대표위원 ‘까리에(Jean-Baptiste Carrier)’는 잔혹한 처형법을 개발했는데, 두 남녀를 알몸인 채로 묶어 루아르 강물에 던지거나 여러 명을 실은 바지선을 침몰시켜 수장시켰다. 물 위로 머리가 떠오르면 도끼로 내리쳐 죽이게 했다. ‘낭트 수장’이라 불리는 이 끔찍한 처형은 주로 교회 재산 몰수에 항의한 수백 명의 사제들과 수녀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부당한 국가 억압에 저항한 시민들을 ‘반혁명자’라는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로 태어났다는 정부에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지닌 전체주의적 광기에 있었다. 혁명 정부는 ‘인민 정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국가에 절대 가치를 부여한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민족주의’를 향하였었다. 문제는 국민총동원령에서 보듯 ‘국가의 영광’을 위해 군사력 강화는 필수며 ‘완전한 승리’만이 국가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패배를 의미했다. 그렇기에 전쟁의 목표는 처음부터 ‘적의 절멸’에 맞춰져 있었다. 그것이 식민지인이든 자국민이든 포로를 처형하고 양민을 남김없이 학살한 나폴레옹과 로베스피에르의 방식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공화국의 방식. 방데 농민들은 ‘공화국의 적이었기에’ 똑같이 대응한 것뿐이다.
혁명 정부는 자신들의 잔혹함을 정당화시키려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다. 혁명군에 지원했다 전사한 14살 소년 이야기를 왜곡한 것이다. 방데군에게 잡힌 그가 ‘국왕 만세!’라고 외치지 않고 ‘공화국 만세!’라고 외치자 그 즉시 목이 잘려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소년은 대대적으로 추모되었고 어린이들은 본받도록 권유되었다. 동시에 ‘방데인은 야만인’이라는 프레임이 전파되었다. 공교육을 장악한 공화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었다. 이로써 방데는 "혁명을 거역한 이름"이 되었고 방데인들은 "조국의 반역자"로 각인되었다.
프랑스는 방데를 경멸했다. 우리의 ‘빨갱이 낙인’과 같다. 대중의 분노를 가장 약한 집단에 투사함으로써 민중을 분열시키고 국가 범죄를 은폐하는 통치술이다. 방데가 여전히 집단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이유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일에 방데 지역은 ‘혁명을 축하하지 않는다’는 시를 낭독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방데 학살에 대해 아직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자국민을 학살한 프랑스’를 인정하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정통성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근간으로 세워진 ‘공화국의 정체성과 프랑스적 가치’가 부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데 학살은 프랑스 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 범죄다. 좌우만 바뀌었을 뿐, 한국 근현대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과 같다. 이처럼 천부인권과 자연권과 저항권을 내세웠던 프랑스 공화국은 출발부터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혁명은 위대한 혁명'이기만 한걸까.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걸까.
프랑스의 '이기적인 자유'
* 참고 자료 : 방데 전쟁, 위키피디아 http://asq.kr/tP19mDbtTuJtx, 방데 봉기 http://asq.kr/Tu9xCiulQD5v0, http://asq.kr/qYrdUjoSrQVi6, 방데 전쟁, 나무위키 http://asq.kr/XxMVklV7UFg6, 프랑스 혁명과 방데 학살 http://asq.kr/xLgD8fufspQgT, 방데 전쟁은 '자유의 쟁취'를 위한 항쟁 http://asq.kr/2P4hKdZDnS9nC, <프랑스 혁명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Dan Sanchez http://asq.kr/ABK5G6M2kFF(번역 http://asq.kr/RJ7Rj22Rqy0d), 공화국식 결혼, 위키피디아 http://asq.kr/AQq9aBJD40GL5, '낭트 수장' 리베라시옹 기사 http://asq.kr/LH4KAAat1nFJE, 위키백과 http://asq.kr/fH031iWQAMGeP, 프랑스 혁명의 이해에서 필요한 건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친 혁명가들의 야만적인 폭력'을 기억하는 것 http://asq.kr/AtaQMkHKnqcx, 프랑스 혁명의 '단일화된 민족주의'가 폭력과 독재를 가능하게 함, 강철구 교수 http://asq.kr/dKitcIJjV4rBH, 프랑스 혁명의 사생아이자 괴물 '징병제' 최재희 교수 http://asq.kr/FdIdhkqqVh3MN, 프랑스 혁명, 나무위키 http://asq.kr/89tPokWx7x9y, 방데, 위키피디아 http://asq.kr/WpaF7icM9Wxxw, 로베스피에르 http://asq.kr/3XEAPYN6hOtf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