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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Aug 15. 2023

빛과 그림자

사내 복지시스템 중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건 도서구입과 학습비를 지원해 주는 거다. 도서구입은 일 년에 몇 차례 선착순이나 추첨을 통해 수혜자가 정해진다. 서비스대행 제휴업체가 소장한 도서에 한해 구입이 가능하다는 제약이 따르지만, 신청 공지문이 올라올 때마다 또 한 권의 책을 품에 안을 수도 있다는 기대로 가득하다.


학습비 지원도 마냥 쉽게만 받을 수는 없다. 성실하게 출석하고 업무와 유관성을 입증한 후에야 일정 경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다행히도 외국어학습은 지원대상에 포함되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혜택을 꼬박꼬박 누리는 중이다.




매년 나를 행복하게 해 줬던 두 가지 지원 외에 새로운 선물이 찾아왔다. 한 달 전쯤, 희망도서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글을 봤다. 독서욕구는 주로 도서관이나 서점을 통해 해소해 왔기에, 최근에는 사내에 꾸려진 자료실을 방문할 일이 없었다. 희망도서 신청 글에도 무반응으로 대응해 왔던 이유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히 인트라넷에 '읽고 싶은 도서를 신청하세요' 정도의 게시글 수준에서 벗어나 '읽고 싶은 희망 도서가 있으신 경우 자유롭게 보내주세요!'라는 친절한 메일을 받았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간서치'를 블로그명으로 쓰는 내가 이런 메일을 외면할 리 만무하다.




'자유롭게'라는 단어를, 나는 정말 자유롭게 해석했다. 무려 10권의 도서를 신청한 거다. 한 달 전 신청할 때만 해도 이 중에 2~3권만 구입해 줘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절판 도서와 이미 보유 중인 책을 제외하고, 무려 8권의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희망도서 신청자에게는 책 우선대출 권한이 주어진다. 어제는, 평소라면 그다지 달갑지 않았을 주말과 공휴일 사이 샌드위치 근무일이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책을 떠올리니 출근하는 발걸음이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책을 받으러 간 김에 재단장을 했다는 자료실에 발도장을 찍었다.




자료실에서 나를 반겨준 첫 주인공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글이었다.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졌다.
All the beauty of life is made up of
light and shadow.


이 문장이 가슴에 더 깊게 새겨졌던 건, 마침 지난 주말에 그간 나의 인생궤적을 연대기로 나눠보며 삶의 음영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사회인으로, 부모로 거듭난 후 걸어온 만 21년을 되돌아보니 찬란한 기쁨 뒤에는 뜨거운 눈물도 있었고, 슬픔으로 비통한 가운데에도 예상치 못했던 행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직장인과 엄마라는 벗어날 수 없는 디폴트 역할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부터, 내 존재의 경계를 뚜렷이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어릴 적 꿈인 대학교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학문의 끈을 놓지 않으며 호모 아카데미쿠스로 거듭나고 싶은 마음에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으며 5년 남짓을 보냈다.


석사를 마친 후 책 읽는 호모 부커스로 도약하며 잠시 휴지기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약 2,650여 권 남짓의 책을 만났다. 책을 읽다 보니, 나만의 문장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문장력이 없는 내가 과연 책을 내도 될지 고민스럽기도 했지만, 내게 당면한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고 싶다는 열망에 지난 5년간 3권의 책을 내면서 호모 스크리벤스로 살았다.


출간저자지만 여전히 작가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나 스스로에게 계면쩍은 마음이 가득했더랬다. 하지만 최근 박연준 작가님의 다음 글을 만나면서 내 글에 대한 부끄러움을 비로소 떨쳐낼 수 있었다.

나는 당신보다 더 잘 쓰거나
더 못 쓸 의향이 없다
나는 딱 나만큼 쓸 것이다




요즘 나는 호모 로퀜스의 시대를 보내는 중이다. 2년 전 일본어 JLPT 공인성적에 이어, 작년에는 원했던 영어성적을 확보했다. 올해는 불어 DELF B1 시험을 80여가량 앞두고 있다. 제 오랜만에 아파트단지 내 독서실을 찾았다. 독서실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장소이기도 하다.


외워야 할 단어와 문장, 문법은 그 끝이 안 보이지만 독해파트는 그나마 외국어 공부 중 가장 정복하기 쉬운 산맥이다. 청해, 말하기, 쓰기 어느 하나 만만하지 않고, 시험 전 마스터해야 하는 분량에 늘 압도당한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호모 로퀜스가 될 수 없다.


내년부터는 중국어를 공부해 원하는 HSK 급수를 확보하고, 이후 스페인어 DELE까지 도전하려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내가 원하는 고지에 다다르기 위해 불가피하게 지나야 하는 그림자의 영역!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찬란한 빛을 마음에 새기며, 글쓰기는 이만 마무리 짓고 다시 불어 책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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