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필라테스였다. 한동안 뜸했던 운동을 재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등록했던 건. 하지만 인생사 대부분이 그렇듯 이번 계획도 예정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동료의 추천으로 시작했던 필라테스. 작년 이맘때 한참 재미를 붙이며 다니다 원치 않았음에도 초급에서 중급으로 승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차했더랬다. 기구 필라테스 중 체어와 바렐을 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초급반일 때는 어찌어찌 견딜만했지만, 중급반으로 올라가니 의지만으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고소공포 증세를 겪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공포심을 심하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수강생들은 모두 잘만 따라 하는데, 홀로 부진아처럼 오도카니 있는 게 못마땅해서 용기를 내서 한 칸 올라가면, 어느샌가 선생님이 슬그머니 내 곁에 다가와 조근조근 말씀을 건네곤 하셨다.
회원님, 한 칸 내려가세요
회원님, 그러다 다치세요!
단호한 선생님의 지시에 주눅이 들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여전히 필린이 상태에 머무르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버무려진 마음상태를 뒤로하고 작년에 필라테스와는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필라테스를 다시 찾게 된 것은 7월 여름휴가를 일본에서 보낸 후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1만 보 걷기와 식이를 병행하며 나름 건강하게 지내던 그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좋은 습관과 1촌 되는 건 그토록 어려운데, 좋은 습관과 헤어지는 건 이토록 쉬울 수 있다니. 허망했다.
갈수록 박약해지는 의지력을 고려할 때 강제력이 부여되지 않는 셀프 운동 프로젝트는 200% 실패를 확신했다. 부담되지 않으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운동을 떠올려보니 몇 개 되지 않았다.
몇 달 전에 한 달 다녀본 줌바는 재미는 있었지만, 강좌가 충분히 개설되지 않으니 제외!
1:1 피티는 3년 가까이 진행했지만, 지겨워서 작년 초에 관둔 경험이 있으니 패쓰!
요즘 유행하는 테니스 등 구기종목은 학창 시절 단 한 번도 재미를 느껴보지 못했으니 드랍!
수영은 배우고 싶지만, 일단 수영복 입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몸매부터 만든 후로 유예!
이것저것 고려하다 보니 결국 남은 선택지는 만만한 필라테스였다. 그다지 숨 가쁘지 않고, 스트레칭이 주를 이루니 혈액순환에도 좋고. 회사 인근에 위치한 곳 중 같은 부서원 분들이 다니는 학원을 제외하니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게 딱 하나 있었다.
점심시간에 상담 예약을 하고, 학원에 들려보니 마침 여름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었다. 수업을 등록한 첫날 퇴근길에 캐딜락수업을 수강했다. 상담일 당일 수강신청을 했다고 발가락 양말을 선물로 받았다.
발가락 양말은 태어나서 처음 신어봤다. 어떻게 신는지 몰라서 끙끙대고 검색해 보고, 막상 검색한 후에도 양말 속에 다섯 발가락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게 고역이었다. 앞이 트여 있어 발톱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민망한 양말을 어찌어찌 대충 신고 첫 수업을 들은 후 집으로 가면서 발가락을 야무지게 다 가려주는 걸로 충분히 샀다.
양말은 충분히 구입했건만, 필라테스 수업을 신청하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개설된 강좌가 몇 개 없는 데다 토요일 오후에 일주일치 예약을 할 수 있는데, 정신줄 놓고 있다 뒤늦게 예약앱에 접속해 보면 저녁시간대 필라테스 수업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한 강좌당 수강생은 최대 6명이기에 경쟁이 더욱 치열했다.
결국 8월 한 달간 필라테스는 딱 4번만 수강할 수 있었다. 회수제로 신청했기 때문에 기한 내 수강하지 못하면 기회를 놓치는 셈이 되기에 개설된 다른 강좌라도 신청해 보기로 했다. 처음 선택한 것은 비트요가였다.
재작년에 소마요가를 온라인으로 수강하다 잠들어버릴 뻔한 흑역사가 있기에 살짝 망설여졌지만, 다른 강좌보다는 진입장벽이 낮아 보여 신청했다. 내친김에 빈야사요가도 들어보고, 나머지 유형인 아쉬탕가요가, 파워요가도 신청했지만, 야근으로 인해 아쉽게 취소해야 했다.
다이어트 댄스도 시도해 봤다. 에어로빅을 신청했다 퇴근이 늦어져 못 들었던 게 내내 아쉽던 차에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신청했다. 대학생 때, 취업준비할 때 에어로빅은 고단한 일상의 활력소였다. 하지만 수업에 들어갔을 때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선생님은 낯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우려 섞인 표정으로 '이 수업은 K-pop에 맞춰 댄스를 배우는 수업이다'라고 강조하셨다. 보이그룹 덕후이기에, 걸그룹 댄스를 배운다는 게 살짝 아쉬웠지만, 더 늦기 전에 뭐라도 배워보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산이었다.
수업은 에스파의 '스파이시'라는 곡에 맞춰 진행됐다. 한 달 동안 한 곡을 마스터하는 과정이었는데, 나만 첫 수업이었고, 다른 멤버들은 이미 기 수강생들이었다. 선생님의 동작을 볼 때는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왜 내가 따라 하려고 하면 세상 어려운 건지. 왜 몇 개 되지도 않는 동작이 선생님 안무 없이 홀로 하려고 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어버리는 건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거울을 통해 익숙한 얼굴의 어색한 두둠칫 동작을 볼 때마다 현타 오는 순간순간을 간신히 버텨낸 후에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 이 세상의 모든 아이돌, 리스펙!!
이름은 미묘하게 달랐지만, 아이돌 댄스 수업을 받아야 하는 강좌를 제치고 난 후에 수강이 가능했던 건 코어운동 그룹 PT. 1:1 피티는 부담백배였지만, 그룹 피티니 강사분의 관심이 분산되어 좀 슬렁슬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에 신청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기기가 없다는 점도 수업에 대한 부담을 줄였다. 상탈 프로필 사진을 올리신 강사분이 부담스러웠지만, 정작 수업엔 온몸을 꽁꽁 동여맨 유교보이 복장이라 수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도전한 건 발레스트레칭이었다. 발레라는 단어가 주는 위화감에 망설였지만, 스트레칭이라는 단어가 함께 하니 괜찮을 거라 다독였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동작도 낯설고 버거웠지만, 처음 들어보는 발레용어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앙 바(En Bas), 앙 아방(En Avant), 알 라 쓰공(A la Second), 앙 오(En Haut). 언제부터 en이 엉이 아닌 앙 발음이었을까?
자정이당! 오늘 오후에 신청하는 담주 수업은 시간 놓치지 않고 접속해서, 듣고 싶은 거 수강신청에 꼭 성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