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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Oct 12. 2023

뇌섹남이 자발적 고졸로 변신한 이유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뇌건강과 신체건강 수준이 탁월한 사람들에게 매료된다. 두뇌게임 승자를 겨루거나 넘사벽 철인이 다수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다. 그제, 야근을 하고 자정 넘어 퇴근했지만 새벽까지 <데블스 플랜>을 시청하면서 최종승자인 하석진 씨에게 입덕해 버렸다.


돌이켜보니 첫 만남에 남편에게 호감을 가졌던 까닭도 그가 뇌섹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면 과정이 복잡하다. 작정하고 깨알노트를 작성하고, 암기법까지 만들어가면서 달달 외워야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정보가 뇌의 수장고에 정리안 된 채로 뒤죽박죽 엉켜있어서인지, 인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곤 한다.


남편은 나와 다르다. 나보다 머리가 커서일까? 남편의 장기기억 저장고는 용량이 큰 듯싶다. 성능도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스키마가 방대해서 체계적으로 차곡차곡 새로운 정보를 쌓아두는 덕일까? 포토그래픽 메모리 기술 보유자라서 별다른 노력 없이 효율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일까?




남편은 하석진 씨만큼 멋진 비주얼의 소유자가 아니다. 강철부대 대원 같은 늠름하고 강인한 체격과도 거리가 한참 멀다. 그럼에도 남편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건, 그가 똑똑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그는 논리 정연하게 배경정보까지 곁들여 설명하곤 한다.


24년 전 내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던 매력이 지금은 꽤나 반감됐지만, 남편의 비상한 기억력에 질투와 흠모가 버무려진 복잡다단한 감정을 갖는 건 여전하다. 존경까지는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남편에 대한 나의 시선이 부정편향적으로 뒤바뀌게 된 건 그가 매일밤 음주라는 건강하지 못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침형 인간에 가까운 내 입장에서 올빼미형 남편은 게을러 보인다. 늦은 밤 혼술을 하니 다음날 이른 기상이 힘겨운 게 당연하다. 이랬던 남편이 갑자기 어제부터 부지런해졌다. 3일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한단다. 본인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고, 나 역시 출근 준비로 바빴기에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지 않고 그런가 보다 했다.


그거 학력위조 아니야?

첫째 날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경비원 신임교육에 참석했다는 거다. 남편은 변호사로 등록만 하고, 활동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성실하게 회비만 납부했더랬다.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취득했지만, 부동산업을 할 생각도 전혀 없다. 얼마 전에는 주택관리사 2차 시험에도 응시했지만, 아파트 관리사무소 취업에도 그다지 관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전적 탓에, 교육을 마친다 해도 남편이 경비원이 되기 위한 구직활동을 할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다.


현실 생활능력이 제로에 수렴하기에 street-smart가 아닌 book-smart에 불과한 남편이지만, 방안퉁수로 남기보다 세상과 소통하려는 시도는 갸륵했다.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치하가 있어야 다른 도전도 해볼 듯싶어, 얼마 전 읽었던, 경비원을 하시는 분이 쓰신 책에 담긴 정보를 공유해 줬다.


"경비원은 이력이 화려하면 채용이 오히려 더 어렵대. 검사 경력은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야, 교육 마친 후에 일자리 찾기가 수월할 듯싶어."

"걱정하지 마. 학력난에 아예 고졸이라고 적었어."

"응? 그거 학력위조 아니야?"

학력위조 레전드 연예인으로 박명수 씨 사례를 접했던 적이 있다. 평생교육원에서 학사과정을 이수했지만, 자신은 고졸이라고 주장한다. 학력위조의 사전적 의미는 "부당한 이득을 위해 자신의 학력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행위"다. 강학적 의미에 따르면 남편은 자신의 학력을 '과장'하기는커녕, 경쟁률 높은 유수대학을 졸업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은닉한 것에 불과해, 학력위조는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여전히 찜찜하다. 하지만,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남편의 진로여정에 훼방꾼이 되고 싶지는 않기에, 나 자신의 삶에 집중하기로 했다. 특히 최근에 마음을 사로잡은 하석진 씨를 긍정모델로 삼아서. 단순히 그의 비상한 두뇌에만 끌렸던 것은 아니다. 물론 수려한 외모가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구태여 변명하지 않겠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이니까.


다채로운 매력지점 중,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더욱 강하게 잡아끈 것은 그의 태도였다. 마지막까지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밤새며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철저한 것도 멋졌다. 그를 보면서 일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을 반추하게 됐다.


나는 그만큼 충분히 프로답게 내 삶에 진심인 걸까? 오늘부터 딱 열흘간만이라도, 일터에서 여성 하석진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노력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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