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1층이 한국 기준으로 2층이다. < Emily in Paris 에밀리 파리에 가다 >의 주인공 에밀리는 미국과 다른 프랑스식 층수에 집을 헷갈린 덕에 아래층 훈남 가브리엘과 애정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보통인의 상식에서 1층이라 여겨지는 로비는 rez-de-chaussée (헤드쇼셰)라고 칭하고 엘리베이터엔 O 또는 RC 버튼이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0층에서 두 개의 문을 지나야 한다. 대문의 역할을 하는 문을 열면 0층에 개인별 전용 우편함을 볼 수 있다. 우리 집은 우편함마다 번호가 있고, 번호별 세입자 이름은 따로 정리해서 오른편에 비치해 뒀다. 유리문 안쪽에 정리한 종이가 자리한 탓에 아무나 수정할 수는 없다.
집을 계약해서 월세를 납입한 지는 벌써 만 넉 달째가 되어가고, 집 안에 터를 잡은 것도 벌써 만 두 달을 훌쩍 넘어가건만 내 이름은 안타깝게도 없다. 보완을 요청했지만, 무심하고 냉담한 집주인은 집을 관리하는 회사로 직접 연락하라고 한다. 회사 홈페이지로 몇 번 연락해 봤지만, 오류 메시지만 나와서 수정할 도리가 없다.
올림픽 버프였는지, 친절했다고 생각했던 프랑스인들이 원래 모습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프랑스인 사이에서는 "올림픽이 끝났으니, 이제 외국인들에게 더 이상 웃을 필요가 없다"는 농담조의 이야기가 떠돈다고 한다. 진위여부를 알 수는 없으나, 외국인이 내가 느끼는 파리인들은 지난달보다는 차갑고 냉소적이다.
전에 살던 세입자 이름이 아직도 버젓이 붙어 있는 우편함 아래편에 소심하게 내 이름을 적어서 붙여놓은 게 우편물을 놓치지 않기 위한 내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지금까지 우편물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직접 신청한 은행카드를 두 번 받고, 누구에게나 보내는 시청의 홍보책자가 전부다. 워낙 우편물이 없기에 광고 전단지마저 반갑게 느껴진다.
지난 토요일 나에게 주는 세 시간의 휴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별 기대 없이 우체함을 열었을 때 광고 전단지 사이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발신인, 수신인 이름이 없는 봉투였다. 봉인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읽어볼 수가 없었다.
집에서 도보로 왕복 1시간 반에 이르는 쁘띠 빨레에 가서 한 시간 남짓 작품 감상을 마치고 책을 두 권 구입한 데다(한 권은 이 글의 대문을 장식한 쿠르베의 작품 설명집이다), 오는 길에 냉동식품 전문점에 들려 신체건강을 위한 등 푸른 생선과 정신건강을 위한 아이스크림까지 구입해서 양손에 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지만, 짐이 많아서 두 사람이 들어가기도 버거운 좁디좁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두뇌를 풀가동했다.
어렸을 때 곧잘 받았던 프랑스 버전의 <행운의 편지> 같은 걸까? 이 편지를 일곱 통 써서 다른 집에 건네지 않으면 불운을 맞닥뜨리게 된다는, 검증되지 않은 흉흉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잘못 보낸 편지 아닐까? 그렇다고 치기엔 봉투에 남겨진 흔적이 전혀 없는데...
딱히 정확한 결론은 못 내리고, 모든 집에 무작위로 보내는 광고성 레터겠거니..라고 지레 짐작한 후 봉투를 열었다. 놀랍게도 편지는 한글로 적혀 있었다. 정갈한 글씨체로 한 장의 편지지를 빼곡하게 채운 글. 본인이 누구인지도 밝혔고 친절하게 연락처까지 남겼다.
여호와의 증인이 선교 차원에서 보낸 홍보 서한이었다. 대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친구와 함께 하숙했던 집도 여호와의 증인 신도님께서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분들이 내게 하는 최상의 칭찬은 "00 학생은 정말 증인 같아."였다.
친구가 증인이었기에, 함께 아는 증인 지인들도 더러 있었다. 증인들 사이에서 왕국이라 불리는 곳에 함께 가서 친구의 침수 세례도 축하해 줬다. 친구는 10년간 교사생활을 하다, 전일봉사를 하는 증인 신도분과 결혼하고 그간 벌어둔 돈으로 왕국에 들어가 살다 몇 년 전에 경기도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아는 증인 지인분들은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고 선량하게 살아가기에, 증인에 대해 나는 대체로 우호적이다. 하지만 어떤 그룹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과 그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직까지 증인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이 꽤 있기에, 안 그래도 버거운 인생길에 고난의 가시밭길을 하나 더 추가할 생각은 없다.
편지의 목적을 알고 나니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떻게 대문을 열고 들어온 거지? 공통 비밀번호가 유출된 건가? 이 분이 알려준 본인 주소는 우리 집에서 도보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일드프랑스 지역이었는데..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우편함에 부착된 이름을 보고 알았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이 건물에 한국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걸까? 갖가지 의혹이 이어졌지만, 어차피 증인 분들은 선도가 목적이지 다른 악의를 갖고 있지는 않으니 불편한 상상의 나래는 그만 펴기로 마음먹었다.
편지를 건넨 분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파리에서 처음 받아본 손 편지는 반가웠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인가, 감격에 젖으려는 순간, 멀리 떠난다며 정성 어린 손 편지를 건네준 몇 동료와 후배님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며칠 내내 비가 내리는 데다 이번주 내내 비소식이 있어서일까? 정 넘치는 한국 지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무척 그리워지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