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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Sep 28. 2024

Hilde in Paris -낯선 경험-

의사샘 앞에서 스쾃 하기

파리에 정착한 지 10주 남짓을 지나는 동안 여러 낯선 경험을 했지만, 오늘은 더욱 뜻깊었다. 처음으로 병원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는 아니다. 다음 달 10KM 단축 마라톤 참가를 위해서는 달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라 파리지엔느>라는 여성들만을 위한 마라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침 바로 다음 달 20일 일요일에 개최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등록한다면 매일 꾸준히 달리는 동기부여용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비를 납부한 후 배번호까지 부여받았지만 아직 등록이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운영진 측이 보내준 QR코드가 찍힌 양식을 출력해 대회 전까지 의사의 사인을 받아서 제출해야 했다.

 



현재 일하는 기관에서 급여를 받는 구조가 아니라서 프랑스 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한국에서 장기체류 보험을 가입했지만, 이런 용도로 일반의를 만나는 비용까지 커버될 리 만무하다. 여기는 의사 얼굴만 봐도 100유로 지불이 기본이라던데... 마라톤 신청비는 47유로에 불과했는데, "과연 이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지출을 감행하면서까지 달리기 대회에 나가야 하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요 며칠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우연치 않게 예전에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있는 분을 통해 지금 근무처 내에 입주한 병원에서 소견서를 발급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분은 기관으로부터 급여를 지급받는 분이라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나는 고용관계가 다르니 가능할 것 같진 않았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병원문을 두드렸다.

 



반갑게 나를 맞이해 준 이는 이탈리아, 중남미, 프랑스가 묘하게 섞인 듯한 인상을 주는, 30-40대 리처드 기어 같은 풍모를 지닌 남성분이었다.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 담당직원과 미팅을 사전에 예약해야 했던 것처럼, 의사 선생님의 소견서를 받기 위해서는 예약날짜부터 잡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프랑스라는 것이 다시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스케쥴러를 살피던 그분은 오늘 예약시간대가 하나 비어 있으니, 원하면 그 시간대에 재방문을 하라고 했다. 재고의 여지도 없이 무조건 오늘 중 방문하겠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의사의 증명서를 받기 전에 상반신을 전부 탈의하고 심전도 검사를 해야 하는데, 오늘 방문한다면 그걸 진행하는 것은 남성인 본인이라고 했다. 여성 입회하에 진행하고 싶다면 다음 주에 일정을 다시 잡으면 된다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나 성격 급하고 불확실성을 극도로 회피하는 나의 대답은 '오늘'이었다. 어차피 검진의 일환이고 그분은 의사 선생님이고 나는 내원객이니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나를 설득했다. 세 아이를 출산하면서 남자 선생님이 계신 산부인과에서 부인과 검진도 여러 번 받아봤는걸...




심전도 검사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검사시간보다 몸에 전극을 부착하는 준비시간이 더 길었다. 우리는 가볍게 신상털이용 스몰톡을 나눴다. 나는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나는 거의 매일 달린다. 한국에서도 이미 10KM에 출전한 경험이 있다. 나는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적절한 수준(?)의 MSG를 담아서 어필했다.


의사 선생님은 본인도 달리고 싶은데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주 1회밖에 달리지 못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하셨다.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니 그분은 나와 동갑이었다. 결혼이 늦었는지, 아이들이 아직 8살, 6살밖에 되지 않아 요즘에는 함께 자전거 타기로 운동을 대신한다고 하셨다.


검사는 침묵 속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 진행됐다. 검사가 끝나고 심전도 결과가 기록된 검사지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결과지에 기록된 파동의 의미도, 깨알 같은 불어로 적힌 의학용어도 모르니 그냥 '매우 정상'이라는 말로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께서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한참 후에 돌아온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면서 복도 끝 사무실에 자리한 여성분에게 나를 인도했다. 알고 보니 이 분이 "진짜"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성분의 정체는?


의사 선생님은 가볍게 여러 가지를 문진 하셨다. 신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도 체크해야 하는지 파리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질문하셨다. 나는 심신이 건강한 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다시 오버액션 세제곱쯤 하면서 슈퍼 울트라 외향형 모습으로 대답했다.


이후 청진기와 혈압계를 함께 사용하면서 맥박과 혈압을 체크하던 의사 선생님이 뜻밖의 요청을 하셨다. 혈압계를 착용한 상태에서 스쾃 30개를 45초 내에 매우 빠르게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손수 스쾃의 모범자세로 시범을 보이셨다. 무릎이 앞으로 나오면 안 되고 다리는 어깨너비로 벌리라는 스쾃의 바이블을.

 



3년 전, 체중 앞자리를 바꿔보겠노라고 매일 엄청나게 운동을 할 때 차인표 씨의 <500개 스쾃>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후 나는 한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스쾃를 했었다. 요즘에는 거의 안 하지만 내게 스쾃 30개는 그렇게 도전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불어로 숫자를 빠르게 세는 의사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스쾃 30개를 정자세를 유지하며 하고 나니... 부끄럽게도 숨이 찼다. 숨이 차는 게 정상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혹시 "불수의근인 나의 심장이 평균이상으로 과도하게 힘들어해서 마라톤 출전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세상 쓸데없는 걱정을 살짝 했다.


다행히 기우는 기우로 그쳤고, 잘 달리라는 응원을 뒤로하고 원하는 선생님의 사인과 병원 직인까지 다 받아서 개선장군처럼 병원문을 닫았다. 나오면서 심전도 검사를 진행한 분께 작별인사를 하고 사무실 문패를 보니 <간호사>라고 그간 여러 번 암기했던 불어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모든 기관이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이곳에선 병원이나 은행과 같은 공공기관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독립된 공간이 주어진다는 점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일했던 곳도 재정난에 시달리기 전까지는 1인 1실을 사용했다고 한다. 자금압박이 시작되면서 2인이 사무실을 공동사용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주 2회 재택근무를 장려하는 것도 단기계약 직원들이 많아지는데 사무실을 계속 늘릴 수 없기에 공간의 효율성을 도모하는 방법의 일환이라고 한다.  




12월 15일에도 에펠탑 인근 10KM 단축마라톤에 회사 동료들과 함께 단체 등록을 했는데, 번거로운 이 절차를 또 반복해야 하나? 다행히 희소식이라며 이제 의사 선생님의 소견서 대신에 PPS만 하면 된다는 러닝팀 간사의 문자를 받았다. 그게 뭔지 모르니 오늘밤 또 다른 <낯선 경험>을 하게 될 듯싶다.


그보다 아직까지는 이런 절차가 불필요한 한국에서 마라톤 대회에 다시 나가보고 싶다. 아.. 그런데 한국은 등록하기 위한 경쟁이 어마무시하게 치열했었다는 걸 깜박 잊었다.


등록 부담 없는 곳에서 달리기 동료들과 신나게 뛸 수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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